살아있는 것이 기적, 脫北入南女의 만리 야화 - 28 기적
살아있는 것이 기적, 脫北入南女의 만리 야화 - 28 기적
  • 이향단
  • 승인 2018.08.28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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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이승희(만주에서부른 이름은 이향단)의 육필수기

4장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기적이다

시련은 있어도 좌절은 없다

언제까지고 계속되는 불행은 없다. 가만히 견디고 참든지 용기를 내쫓아 버리든지 이 둘 중의 한 가지 방법을 택해야 한다.

- 로망 롤망

한국을 가려고 시도하다가 두 번이나 사기를 당하고 이번에는 5,000원을 주고 가짜 신분증을 만들고 계속 되는 사기에도 여전히 한국을 가려고 하고 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아무런 일도 하고 싶지 않고 손을 놓고 속수무책으로 살아가고 있다. 무엇을 먼저 해야 하고 어떤 것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지금은 한국 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오직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뿐이다. 한국으로 가야만 내 꿈과 희망을 펼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중국에서의 불법체류자의 생활은 너무 힘들고 한 고비 한 고비 넘을 때마다 많은 슬픔과 고통을 이겨내야 했다. 언제쯤 내 마음속 무거운 짐을 훌훌 털어 버릴 수 있을까. 한국으로 가야만 나는 두 다리 두 팔을 뻗고 잘 수 있을 것이다.

하루는 양장점에서 일을 하는데 같이 일을 하는 언니가 자기 동생이 한국과 일본 수속을 한다고 하면서 이번에 자기네 신랑이 일본으로 나간다고 한다. 나는 그 집에 아저씨가 일본가는 것을 보면서 같이 일하는 언니에게 나는 한국으로 가고 싶은데 동생에게 부탁해서 한국으로 가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정작 부탁은 했지만 이번에는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여러 번의 사기를 당하다보니 그냥 밑져야 본전이지 하는 식으로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한국을 가겠다는 말이 노래처럼 흘러나온다. 그렇게 한국에 가겠다고 하고는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하루는 출근을 해서 막 일을 시작하는데 양장점에 전화 벨소리가 울린다.

2003년 5월 15일 아침에 심양에서 로반(사장)에게 전화 왔다. 전화를 끊고 로반(사장)이 나를 보며 한국 가겠다고 한 사람 한국 가고 싶으면 오늘 저녁에 바로 심양으로 들어오라고 한다며 한국을 가겠느냐고 나에게 물어본다.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선뜻 응해 나섰다. 나는 하던 일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다른 일은 대충 정리하고 신랑에게 전화를 했다. “자기야, 나 지금 한국으로 가려고 그러는데 지금 심양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아.” 하니 신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집에 돌아와서 간단하게 갈아입을 옷에 소지품을 챙겨서 기차역으로 향했다. 기차역에 와서 심양으로 가는 기차표를 사고 차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신랑 친구가 가는 도중에 먹으라고 먹을 것을 한가득 사가지고 역으로 왔다.

앞으로 어떤 결과가 될지 몰라서 나는 잠시 시댁에는 알리지 않고 신랑하고 둘이서 심양으로 갔다. 그런데 생각지 않던 사람이 나타나 잘 가라고 하면서 먹을 것을 주는데 어쩐지 한편으로 이번 일이 잘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심양에 도착하니 한국 수속을 해주는 사람이 역에 나와 있었다. 그 사람은 우리를 민박집으로 안내했다. 우선 오늘 저녁 자고 내일 다시 오겠다고 한다. 우리는 그 사람이 하라는 대로 민박집에 묵었다.

다음날 우선 머리는 파마 하라고 한다. 그날은 하루 종일 미용실에 있었다. 먼저 파마를 하고 다음 염색을 하고 머리를 자르고 하루 종일 내 몸에 변화를 주었다. 하루 종일 미용실에 앉아 머리를 하고 왔는데도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그날 저녁은 민박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일찍 누워서 잠이 들었다. 다음 날은 우리를 데리고 사진관에 갔다.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고 우리를 보고 민박집에 가서 기다리라고 한다.

우리는 다음 날 부터 민박집에 먹고 자고 먹고 자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기만 하였다. 이틀 사흘 지나도 아무런 연락도 없어 어떻게 되는 건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연락을 하려고 해도 전화번호도 없고 오직 그 사람이 연락이 와야 우리는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사흘째 아무런 연락이 없어서 나는 밤에 잠도 못 자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날 민박집으로 연락이 왔다. 민박집 아줌마가 우리에게 전화를 받으라고 한다. 지금 빨리 어디로 나오라고 한다. 한국 수속을 해주는 사람이 내일 한국에 가는데 당시 한국에서 유행하는 옷과 신발 그리고 가방을 사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 돈이 있어야 된다면서 한국 돈을 환전하는 곳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신랑은 나에게 한국 돈 15만 원을 환전해서 내 지갑에 넣어준다.

한편 우리가 일주일째 연락이 되지 않자 어머니는 내가 일하던 복장점에 연락을 해서 내가 지금 심양에 있다는 것을 알고 한국 수속을 주는 사람에게 전화를 해왔다. 한편 시댁에서 아버님은 나를 한국으로 못 보내겠다고 하신다. 돈을 들여서 한국에 보냈는데 만약 신랑을 버리면 돈도 잃고 사람도 잃는다며 한국 가는 것을 반대 하신다. 아버님 이야기를 들으신 어머니는 보내자니 아버님 말씀대로 내가 한국 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자기네가 손해를 볼 것 같고 안 보내자니 계속 쫓겨 다니는 신세지, 어머니는 가운데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결정을 내리지 못 하는데 아주버님(신랑 형)은 저를 한국에 보내 주어야 된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다시 전화를 드린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시댁에 전화를 하였다. “어머니 저 지금 한국 가려고 심양에 와 있습니다.”라고 말씀 드렸다. 한국에 간다는 소리에 시댁에서는 모두 놀라는 눈치였다. 이때까지 중국에서 잘 살아 왔는데 한국에 간다고 하니 혹시 내가 한국에 가서 시댁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많이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아버님은 나를 한국에 보내지 말라고 한다는 것이다. 나는 시어머니의 이야기를 이해를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말씀이 끝날 때까지 나는 듣고 있다가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어머니, 사람한테 기회라는 것이 계속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한국 가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게 많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신랑하고 연결되는 자식도 없는 저를 보내자니 마음에 걸리는 거 저도 모르는 건 아닙니다. 허나 자식이 없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보지 마세요. 지금 중국에 자식이 있는 조선족(교포)들도 한국에 돈 벌려고 나갔다가 자식을 버리고 이혼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식이 있든 없든 그건 큰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여기에서 한국 간다고 마음이 변하고 안 변하고는 여기에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 말을 듣던 어머니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네 마음을 알기 때문에 한국에 보내려고 한다.” 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어머니는 전화를 끊으신다.

그날 저녁 민박집에 왔다. 신랑에게도 어머니께 드렸던 그 말을 똑같이 해주었다. 다음 날 우리는 한 호텔에서 한국 수속을 해주는 사람을 만났다. 그곳에서 한국 남성분도 만났다. 2003년 5월 25일 심양공항으로 나오기 전에 한국 남성분이 나에게 비행장에서 여권 검사를 할 때 어떻게 하라고 몇 가지 주의사항을 알려 준다. 그리고 비행장으로 향해 출발했다. 신랑은 비행장까지 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우리는 헤어졌다. 신랑은 그 길로 연길로 돌아갔다. 2003년 5월 25일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심양공항에 들어서니 나가는 홈이 세 곳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출국을 하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상황인데 나는 거기에 서서 어느 쪽으로 나가면 무사히 통과 할 수 있을까 고민을 했다. 여권을 검사하는 곳은 세 곳이었다. 세 곳 중에 2명은 남자고 1명은 여자였다. 남자분한테 줄을 서서 기다릴까 어디에 설까 고민을 하는데 여자가 검사하는 줄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나는 고민할 것 없이 바로 사람이 적은 곳에 줄을 서 있었다. 줄을 서 있는 동안 심장은 한없이 방망이질 치고 얼굴은 화끈 달아올랐다. 혹시나 얼굴이 뻘개졌을까 싶어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보며 내 얼굴색을 확인했다. 다행히도 얼굴색은 변하지 않았다.

그때 마음속으로 아버지한테 잘되게 해달라고 얼마나 소리쳤는지 모른다. 마침 내 차례가 왔다. 여기에서 잘못되면 나는 완전 죽은 목숨이다.

알렌 코헨의 말이 생각난다.

“모험은 안정보다 더 위대하며, 삶에는 아직도 개척해야 할 영토가 무궁무진하다.”

나는 여권을 내밀었다. 비행장에 나오기 전에 남자분이 주의를 주던 것처럼 계속 검사하는 사람만 쳐다보고 있었다. 여권을 검사하는 사람은 여권을 보다 나를 한 번씩 쳐다보고를 2~3번을 반복한다. 그때마다 나는 눈을 똑바로 뜨고 그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나를 보고 신분증을 달라고 한다. 나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여자가 하는 말이 들리지가 않았다. 신분증을 달라고 세 번을 이야기하는데 중국말로 1번, 한국말로 2번 말한다. 그래도 알아듣지 못하니까 내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한국 남성이 신분증을 보자고 이야기한다고 하는데도 알아듣지 못하였다. 할 수 없이 한국 남성이 지갑에서 자기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면서 이걸 보자고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때야 비로소 말이 귀에 들어온다.

사람이 긴장을 하니까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때 내가 늦게나마 신분증을 꺼내서 여권 검사하는 여자에게 주니 그 여자는 계속 여권하고 신분증을 기계에다 대보고 여권 앞뒤로 뒤져보더니 도장을 들고 꾹 찍어준다. 도장을 찍어주는 순간 내 눈에는 눈물이 핑 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눈물을 흘리면 안 된다고 마음먹고 울컥하는 마음을 가까스로 잡고 대기실에서 나와 의자에 앉았다. 다른 사람들이 볼까 봐 눈물을 훔쳐가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얼마나 꿈에 그리던 한국행인가. 몇 년에 걸쳐 성공한 일인지 모른다. 나는 비행기에 앉아서도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지금이라도 와서 나를 잡아갈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비행기가 다 상륙할 때까지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출발 시간만 기다렸는지 모른다. 이런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시간은 그날처럼 더디게 가기는 처음인 것 같았다. 기다리던 끝에 비행기 문이 닫히고 안내 방송이 흘러온다. 지금 우리 비행기는 심양공항을 출발하여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입니다. 비행기가 상륙하는 순간 나는 마음속으로 ‘성공이다~~~~!’를 외치면서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기나긴 시련의 시간이 가져다 준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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