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것이 기적, 脫北入南女의 만리 야화 - 29 대한민국
살아있는 것이 기적, 脫北入南女의 만리 야화 - 29 대한민국
  • 이향단
  • 승인 2018.08.29 00: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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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이승희(만주에서부른 이름은 이향단)의 육필수기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내가 어디에서 태어났고 어디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무었을 했느냐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 조지아 오키프

오늘날 대한민국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나와 같은 탈북자들을 동포애의 따듯한 정으로 받아주고 행복하게 살게 해 준 대한민국 국민들 앞에 머리 숙여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비행기가 이륙을 함과 동시에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우리 비행기는 심양공항을 출발하여 대한민국 인천공항에 도착하였습니다. 9년이라는 외롭고 기나긴 시련의 항해 끝에 내가 찾은 희망의 등대였다.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나는 황홀한 인천공황을 보면서 신기함보다도 부모형제를 버리고 왔다는 죄책감과 이곳으로 함께 오지 못한 가족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공항에 들어와서 또다시 여권 검사를 받게 되었다. 이번에는 중국과 달리 여권 검사하는 사람이 내 여권을 보더니 이 여권이 누구 거냐고 물어본다. 나는 내 여권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여권을 검사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부르더니 그 사람이 나에게 누구 여권인지 제대로 이야기하라고 한다. 한참을 서서 내 여권이라고 하니 나를 보고 하는 말이 우리가 전문여권만 보고 일을 하는 사람인데 이 여권을 보고 모르겠는가 하면서 이 여권이 가짜라면서 자기 따라 오라고 한다. 그 사람을 따라 간 곳은 공항 출입국사무소였다.

내가 들어가니 많은 사람들이 나를 쳐다본다. 나를 데리고 간 사람이 동료들과 말을 하는데 여권을 보여 주면서 이 사람이 가짜여권으로 한국에 왔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나를 보고 집 주소를 말하면 다음 비행기로 중국에 보내겠다고 한다. 나는 계속 내 여권이라고 우겼다. 그러니 그 사람이 자꾸 버티면 경찰을 부르겠다고 한다. 경찰이 오면 내가 더 손해라고 하면서 빨리 집 주소를 말하라고 한다. 경찰을 부르겠다고 하기에 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경찰이 오는 것이 나에게 유리한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한참 지나서 사복을 입은 경찰이 나에게 와서 집 주소를 말하면 집으로 돌려보내겠다고 이야기한다. 순간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중국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경찰이 나를 보면서 중국 사람이 아니면 어디사람이냐며 계속 집 주소를 말하라고 한다. 나는 그때 경찰에게 북한에서 왔다고 말했다. 경찰은 내가 북한에서 왔다고 하는데 믿지 못하는 눈길이었다. 그러더니 진짜 북한에서 왔느냐고 하더니 종이 한 장과 볼펜을 주면선 탈북한 경위를 간략하게 적으라고 한다. 나는 너무 긴장한 탓에 손을 떨면서 글을 썼다. 한 장을 다써내려 갈 무렵 검은색 양복을 입은 남성들이 6명이 내 주변에 서있었다. 그리고 내가 쓴 종이를 받아서 프린터에 6장을 복사하더니 한 사람이 한 장씩 나눠 가진다.

남자 3명이 나를 데리고 공항 뒤 문으로 나와 차에 타라고 한다. 차를 타러 가면서 한 사람이 나에게 물어본다. “진짜 북한 사람 맞아요?” 한다. 나는 진짜 북한 사람 맞다고 말했다. 그런데 한국말을 왜 이렇게 잘 하느냐고 물어본다. 나는 한국에 오려고 한국말을 배웠다고 말했다. 그리고 3시간 가까이 달려서 국정원에 도착하니 큰 철문 앞에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또 나를 어떤 감방에 넣는다고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국정원인 줄 몰랐다. 국정원에 들어가면서부터 내 설움에 계속 울었다. 국정원에 들어가서 내 발 사이즈를 재고 옷 사이즈를 물어본다. 한참 후 남자분이 세면도구에 운동복(추리닝)을 가져다주면서 자기 따라 오라고 한다. 같이 따라 간 곳은 2층 한 방문 앞이었다. 문을 열더니 나에게 들어가라고 한다. 국정원 직원은 내 뒤를 따라 들어오면서 방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사람 잘 달래라고 계속 울기만 한다면서 이야기하고 나간다.

나는 신발을 벗고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한참을 훌쩍거리고 있는데 한 언니가 내게 다가와서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본다. 나는 그 언니의 물음에 언니를 올려 보면서 내 눈을 의심했다. 어떤 감방일 것이라 생각을 했는데 이게 웬일인가. 전부 다 탈북자들만 있는 곳이었다. 한 방에 13명이 있었는데 나는 계속 울면서 들어가던 상황이라 거기에 있는 사람들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나는 탈북자들이 그렇게 많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 언니는 나에게 “어디서 왔고, 한국에 어떻게 왔는가?” 하고 묻는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그곳이 국정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탈북자가 그렇게 많이 한국에 들어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3일 동안 울었다. 함께하지 못한 가족 생각, 살아생전 그렇게 오고 싶어 하시던 아버님 생각에 눈에서는 눈물이 멈출 줄 몰랐다. 고○○ 언니가 울고 있는 내게 다가 와 “왜 우니. 울지 마라. 니가 울면 우리도 울고 싶어.”라고 말을 한다.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릴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 내 생각만 하다 보니 옆 사람들의 생각을 안 했구나 싶어서 너무 미안했다. 나는 더 이상 울지 않기로 결심을 했다.

한국에 와서 국정원 생활을 할 때 처음으로 경찰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 한국에서의 사이렌 소리는 더 이상 공포로 들리지 않고 정겹게 들렸다. 아무리 사이렌 소리를 크게 내도 나는 더는 주눅이 들지 않고 당당해졌다. 중국 같았으면 나도 모르게 혼자 마음을 졸이면서 살았을 것인데 이제는 내가 그럴 이유가 없었다. 두 팔, 두 다리를 뻗고 잘 수 있는 것이 너무 좋았다. 나는 국정원에서 한 달을 지냈다. 국정원에서의 생활은 비록 자유는 없었지만 더 없이 행복했다.

내 조국은 세계요, 내 종교는 선을 행하는 것이다. T. 페인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건강하고 부유하게 살 수 있는 곳이면 어디나 나의 조국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조국은 세계요, 우리 동포는 전 인류이다. 자기의 조국을 모르는 것보다 더한 수치는 없다. 자기의 조국은 어디든 자기가 잘 지낼 수 있는 곳이다. 내가 가장 번영하는 곳에 나의 조국이 있다. 모든 사람의 모든 애정은 하나의 조국에 묶여진다.”

나는 앞으로의 꿈과 희망을 그려보았다. 사회에 나가서 내가 할 일들을 생각해보았다. 며칠이 지나자 나는 조서를 받게 되었다.

조서를 받는 동안에는 독방에서 일주일동안 혼자 지내야 했다. 방에 달린 작은 창문이 하나 있었다. 어느 날 밖에서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창문가에 얼굴을 붙이고 밖을 내다보았다. 먼저 조서를 마친 사람들이 운동장에 나와 농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외로움과 지루함을 달래보려고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인터폰이 울리더니 나를 보고 창문에서 떨어지라고 한다. 밖을 내다보면 안 되는 것 같았다. 그 다음부터는 아무리 밖을 보고 싶어도 나는 꾹 참았다. 독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먹고 자는 것 외에는 감방이 따로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조서를 받는 내내 매일 같이 1:1 심문이 이루어졌다. 국정원에서는 남한에 침투하는 북한공작원과 탈북자로 위장하여 한국으로 들어오는 중국 조선족들을 가려내는 일을 했다. 매일 같은 질문을 할 때도 있었다. 나는 두 번의 탈출 경로와 중국에서의 삶을 하나도 빠짐없이 사실대로 말했다.

하루는 나를 심문하던 국정원 직원이 나를 보고 진짜 북한 탈북자가 맞느냐고 물어 본다. “네.” 하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나를 보고 그런데 왜 이렇게 탈북 경위에 대해서 잘 아는가 하고 물어 본다. 나는 내가 겪은 일인데 내가 모르면 누가 아느냐고 다시 물었다. 국정원 직원은 나의 물음에 아무 말도 안하고 나간다. 후에 안 일이지만 중국 조선족들이 다른 사람의 탈북 경위를 외우고 들어오는 일이 있다고 한다.

조서가 끝나는 날 국정원 직원은 나에게 거짓말 탐지기 검사를 하였다. 거짓말 탐지기 검사를 해도 별다른 이상이 없자 국정원 직원이 나에게 “이승희씨 이름이 진짜네요.”라고 한다. 나는 “네, 진짜 제 이름이 맞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저는 거짓말을 안 합니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일주일이라는 조서기간이 끝나고 독방에서 나오면서 조서가 끝난 사람들과 합류했다. 조서가 끝나면 약간의 자유가 주어진다. TV도 볼 수 있고 밖에나 갈 수 있는 조건도 된다.

조서가 끝나고 며칠 지나서 국정원 직원이 갓 조서를 마친 사람들 4명을 데리고 서울시를 구경시켜 주고 옷을 사러 백화점에 가기도 했다. 모두들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웃고 떠드는 시간에 나는 자가용 뒷좌석에 앉아 선글라스를 쓰고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함께 하지 못한 가족을 생각하니 서울의 아름다운 풍경을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함께 나간 사람들은 국정원 직원에게 “점심으로 뭐 먹고 싶은데 그것 사 주세요.”, 또 “어디 가고 싶은데 그곳으로 가주세요.” 하면서 웃고 떠든다. 나는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를 보고 국정원 직원이 물어본다. 이승희씨는 왜 웃지도 않고 동료들과 어울리지 않느냐고 나에게 말한다. 나는 설움에 잠겨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국정원 직원은 대답을 못하는 나를 보고 더 묻지 않는다.

우리들이 먹고 구경하고 쇼핑하는 데에 대한 계산은 국정원에서 지불해주었다. 우리가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이 모든 것은 국정원에서 제공해주었다. 근심걱정 없이 사는 것이 고마웠다. 대한민국을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수많은 탈북자들을 받아주고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많은 배려를 해주었다.

중국에서 한국으로 올 때 그 무엇도 필요 없고 단지 신분증만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을 했었다. 한민족이라는 이 세 글자 때문에 나와 같은 탈북자들을 정부에서는 정착금도 지원해주고 무료로 배울 수 있는 과정을 제공해주었다. 국정원에서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주었다. 국정원에 있을 때 나는 결심을 하게 되였다. 지금의 내가 받은 것에 대해 언젠가는 나도 꼭 보답하리라. 정말 대한민국이 너무 고마웠다. 그리고 행복했다.

“하루에도 백 번씩 나는 나의 삶이, 살아 있는 혹은 죽은 사람의 노고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되새긴다. 그리고 받은 것만큼 되돌려 주기 위해 얼마나 많이 노력해야만 하는가를 스스로 일깨운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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