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것이 기적, 脫北入南女의 만리 야화 -30 시작
살아있는 것이 기적, 脫北入南女의 만리 야화 -30 시작
  • 이향단
  • 승인 2018.08.30 13: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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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이승희(만주에서부른 이름은 이향단)의 육필수기

다시 시작하는 삶

배움이 없는 자유는 언제나 위험하며 자유가 없는 배움은 언제나 헛된 일이다.

- 존 F. 케네디

하나원을 퇴소하고 2003년 8월 26일에 대구로 내려왔다. 하나원에서 집 배정을 해주었다. 나는 대구에 내려와 일주일을 쉬었다. 8일째 되는 날 나는 신변보호 담당관과 함께 대구고용지원센터를 방문했다.

 

새터민을 담당하는 분에게 미용을 배우고 싶은데 어느 학원에 가야 하는지를 알아보았다. 새터민을 담당하는 담당자분이 나를 보고 하는 말이 조금 더 집에서 쉬고 대구 지리도 알고 난 뒤 학원을 다녀도 늦지 않다고 한다. 지금 이 상태에서 학원 갔다가 집도 못 찾아가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다. 나는 담당자에게 괜찮다고 꼭 지금 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말했다. 나의 확고한 결심에 담당자분이 그러면 내일 다시 지원센터로 방문을 하라고 한다. 담당자는 자기와 함께 학원에 가자고 한다.

다음날 나는 새터민 담당자와 함께 미용학원을 방문했다. 모든 수속을 새터민 담당자가 해주었다. 나는 다음날부터 미용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미용학원을 나간 첫날 나는 미용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려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를 타고 1시간 가까이 지나면 내가 아는 거리에 있어야 할 시간인데 아무리 창밖을 내다보아도 내가 아는 거리가 아니다. 집으로 가는 버스 번호는 맞는데 ‘이상하다. 여기가 어디지?’ 하면서 가는데 버스는 어느새 종착역에 도착했다. 종착역에 도착해서 보니 집 방향하고 반대 방향에 버스에 올라서 다른 곳으로 가버린 것이다. 역시 고용센터 담당자 말대로 집도 못 찾아간 것이다. 나는 다음 버스를 타고 대구 시내를 한 바퀴 돌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 집을 못 찾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미용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지 45일 만에 겨우 필기시험을 볼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학원에 들어와 일주일 만에 필기시험을 보았다. 나는 수업시간에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고 책의 내용도 알아 볼 수가 없었다. 분명 같이 쓰는 한국말인데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한마디도 없었다. 미용에 관한 용어는 모든 것이 영어식 한국말이라 더욱 어려웠다. 할 수 없이 집에 와서 필기시험에 관한 책을 펼쳐놓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 반복해서 보고 또 보았다. 그렇게 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6번을 보게 되니 조금씩 내용을 알아가게 되었다.

필기시험 보러 가기 전날 선생님은 나에게 “이승희씨 부담 갖지 말고 그냥 이런데도 있네.” 하는 식으로 갔다 오라고 한다. 너무 기대를 하면 그만큼 실망도 크다면서 나에게 편안한 마음으로 갔다 오라고 한다. 선생님은 나에게 그 말을 세 번이나 했다. 나는 부담 갖지 말고 갔다 오라는 선생님의 말을 들으면서 순간 화를 내면서 “선생님, 그만 말하세요. 저 공부 많이 했습니다.”라고 큰소리로 말을 했다. 순간 선생님은 깜짝 놀라시며 “나는 승희씨를 걱정해서 말한 건데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신다. 나는 선생님께 “물론 저도 선생님이 저를 생각해서 말씀하시는 거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닌데 그래도 그런 말 하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당시 학원에 나 말고 다른 새터민이 있었는데 필기시험에서 6번을 탈락하면서 선생님이 나도 실망을 할까 봐 나에게 해주신 말씀이었다. 필기시험은 오전 10시에 공단에서 보았다. 그날 필기시험을 보는 사람이 200명 가까이 왔다. 우리 학원에서도 26살 아가씨하고 나하고 두 사람이 갔다. 시험을 보는 내내 긴장을 한 탓에 손이 떨려서 시험을 어떻게 보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오전에 시험을 본 결과는 오후 3시에 게시판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점심도 먹지 않고 오후 3시까지 공단에서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오후 3시에 나온다는 시험결과가 2시 30분경에 나왔다. 나는 게시판에서 내 시험 번호를 찾았다. 나의 시험번호가 맨 윗줄에 첫 번째로 적혀있었다. 나는 너무 기뻐서 나의 신변보호담당관에게 전화를 했다. “형사님, 저 필기시험에 합격했어요.”라고 하자 수화기 너머에서 형사님이 “수고했다. 니가 잘할 것이라는 생각을 고용센터에 갔을 때 니가 하는 것을 보고 알아보았다”고 말씀하셨다. 20일 뒤 실기 시험 날짜가 잡혀 있었다. 나는 고민할 필요 없이 실기시험을 신청하고 학원으로 왔다.

그날 우리 학원에서 같이 간 아가씨는 탈락되고 나는 합격을 하고 학원에 오니 제일 먼저 축하해주신 분이 나를 가르쳐 주시던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은 진심으로 나를 축하해 주셨다. 그날 나는 선생님께 저번에 “선생님이 저를 생각해서 해주신 말씀인데 화를 내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아니다. 내가 이승희씨 마음을 미처 몰랐다”고 했다. 선생님께 “저 20일 뒤 실기시험을 등록하고 왔습니다.”라고 하니 선생님은 나에게 너무 빨리 신청한 것 아니냐고 말한다. 아직 진도가 나가지 않은 신부화장과 휭거 웨이브수업 진도를 나에게 빨리 가르쳐 달라고 선생님께 부탁드렸다. 선생님은 진심으로 내가 잘되기를 바라셨고 나에게 필요한 모든 기술을 전수해 주었다.

나는 학원 문을 여는 시간인 오전 9시에 도착해서 학원이 문을 닫는 밤 10시까지 쉬지 않고 점심을 먹지도 않고 열심히 연습을 하고 또 연습을 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연습에만 집중을 했다. 물도 마시지 않고 오직 연습하고 화장실 가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은 전혀 하지 않았다. 나는 학원에 들어가 65일 만에 실기시험을 보았다.

공단에서 실기시험을 보았다. 그라데이션 컷트가 첫 번째 시험이었고 다음은 롤, 파마를 말고 신부화장을 하는 식으로 하여 모든 것을 주어진 시간 내에 완성을 해야 한다. 마지막 신부화장을 하는데 나는 모델이 없어서 내가 모델이 되었다. 시험이 끝나고 다른 사람들은 가족들이 와서 차에 대기하고 있다가 데리고 가는데 나는 얼굴에는 신부화장을 하고 미처 지우지도 못하고 그대로 버스에 올랐다.

얼굴에는 평상시에 하는 화장이 아닌 화장을 하고 부끄러워서 얼굴도 못 들고 버스에 앉아서 오늘 같은 날 가족이 없는 외로운 생각을 하고 있는데 스피커에서 ‘불효자는 웁니다’ 노래가 흘러나온다. 순간 나는 너무 외로워서 버스에서 울고 말았다. 울면서 학원에 도착했다. 학원에 들어와서 신부화장을 지우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실기시험에 대한 결과는 일주일 뒤 인터넷으로 발표한다고 한다. 나는 일주일 뒤 컴퓨터 앞에 앉았다. 순간 시험을 보는 것보다 더 긴장되는 느낌. 나는 인터넷에 들어가 나의 주민번호를 적고 마우스를 누르려는 순간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하고 마우스를 눌렀다. 나의 시험결과는 합격이었다.

다음날 학원에서 원장님이 나를 부르시더니 학원이 생긴 이래에 두 달 만에 자격증을 취득하는 사람이 없었다면서 나를 축하해 주었다. 언제나 웃으며 기술을 배워 주신 강○○선생님 그리고 나에게 필요한 도구들을 아낌없이 지원해주신 박○○원장님 그리고 함께 배우면서 도와준 수강생들의 도움으로 자격증을 빨리 취득할 수 있었다.

학원 다니는 동안 나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크게 말도 하지 않고 있으니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이 나를 보고 바보인 줄 알았다고 한다. 3개월이 지나면서 사람들과 말을 하게 되었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며칠 뒤 학원에서 강○○미용실에 나를 소개해 주었다. 나는 오전에는 학원에서 기술을 배우고 오후에는 미용실에서 실전기술을 배우게 되었다.

2005년에 대경대학 뷰티학과에 입학 했다. 당시 나의 꿈은 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들보다 많은 공부를 했고 많은 자격증도 취득 하였다. 나는 대경대학을 졸업하고 낮에는 일하면서 밤에는 학점은행제 공부를 했다. 미용사자격증, 미용실기교원자격증, 두피관리사자격증, 피부관리사자격증 등 뷰티에 관한 자격증은 모두 취득하고 추나요법에 관한 교사자격증도 취득하였다. 한국은 스펙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나는 앞만 보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그러다 2008년 12월에 출산을 하면서 공부도 일도 중단하였다. 나는 출산과 함께 아이 양육만 하면서 집에서 몇 년을 쉬였다. 집에서 몇 년을 쉬다보니 나의 생활은 온데간데없고 하루 종일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이, 나도 아침에 일어나면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집 청소하고 빨래하고 하면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온다. 아이하고 놀다가 저녁 먹고 자고 매일 똑같은 하루가 계속 반복해서 돌아가다 어느 날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하던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대학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꿈꾸고 다시 웃으며 다시 행복해지고 싶었다.

“끝없이 전진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치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리고 많은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자신이 큰일을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러면 당신의 계획은 실현될 것이다.” - 나폴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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