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것이 기적', 脫北入南女의 만리 야화 -35 기적
'살아있는 것이 기적', 脫北入南女의 만리 야화 -35 기적
  • 이향단
  • 승인 2018.09.05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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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이승희(만주에서부른 이름은 이향단)의 육필수기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기적이다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말은 없다.

- 나폴레옹

햇살이 따뜻한 5월 봄에 꿈에 그리던 한국으로 왔다. 국정원에서 한 달 동안 생활하면서 내가 느낀 것은 대한민국 사람들은 참 따뜻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을 보면서 한민족의 동포애를 느꼈다. 대한민국이 어렵고 힘들 때는 나는 북한에서 아주 풍요롭게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편안하게 살았다. 그러다 대한민국이 점점 잘 살게 되고 북한은 어렵게 살게 되면서 나는 이 나라에 왔다. 국민들이 피와 땀을 바쳐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나는 이 땅을 위해 아무것도 해 놓은 일이 없는데 대한민국은 나를 받아주었다. 앞으로 열심히 살아서 언젠가는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해 꼭 보답하면서 살아가리라 결심을 했다.

 

대구에 임대주택을 받고 이곳에 정착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신변보호담당관님과 함께 대구에 왔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어언 십여 년이 지났다. 하나원에 있을 때 가졌던 꿈을 이루기 위해 일주일만 쉬고 공부를 시작하였다. 대구에 내려 온 지 며칠이 안 되어서 대구 지리도 잘 모르는데 좀 더 쉬면서 어느 정도 대구 지리도 알고 공부해도 늦지 않다는 고용지원센터 담당자의 만류에도 배우려는 내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렇게 학원등록하고 학원 간 첫날, 방향을 보지 않고 무작정 집으로 가는 버스번호만 보고 탔다가 집하고 반대로 가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학원에서 집으로 가려고 버스정류장에 나왔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니 20대 초반의 청년이 쥐고 있던 돈 400원을 나에게 보여 주면서 버스를 타야 하는데 돈이 모자라서 버스를 못 탄다고 돈을 달라고 한다. 나는 얼른 지갑에서 1,000원을 꺼내서 주었다. 당시 버스 한 번 타는데 600원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그 버스정류장에 가니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또 버스비가 없다며 돈을 달라고 이야기한다. 그날은 잔돈이 없어서 주지 못했다. 다음 날 학원에 가서 전날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학원 학생들이 하나 같이 돈을 주지 말라고 나에게 말을 한다. 요즘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해서 돈을 계속 요구한다고 말을 한다. 나는 다음부터 주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다음부터 돈 달라고 하는 사람이 없어졌다.

하루는 미용사 필기시험 준비를 하느라고 집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려서 문을 열고 나가니 어떤 남자와 여자분이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며 불교에서 나왔는데 불우한 사람들을 도와 달라고 한다. 그리고 저세상에 간 사람들의 영혼을 기린다고 한다. 그날 지갑에 돈이 없어서 안 한다고 집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그들이 현관문을 잡고 그러면 물이라도 한잔 달라고 하면서 문을 놓지 않는다. 나는 그럼 집에 들어와서 물이나 한잔 먹고 가라고 했다. 그들은 집에 들어와서 물을 마시고 나갈 생각은 안하고 앉아서 계속 불우이웃을 돕는데 돈을 달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주고 싶은데 돈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니 남자가 엉덩이를 붙이고 자는 척한다. 나는 이 사람들이 그냥은 안 가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갑을 꺼내 보이면서 5,000원을 있었던 것을 주었다. 그 5,000원도 내 돈이 아니었다. 전날 한 동에 사는 애가 나에게 공단에 시험 보러 가면 자기 미용사 자격증을 좀 찾아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격증을 받을 때 수수료가 든다면서 주던 돈 5,000원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그 이야기를 하면서 주었다. 그러니 그제야 엉덩이를 들고 나간다. 그 이후로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집에 못 들어오게 한다.

그 후 학원에 가고 있는데 이번에도 여자와 남자분이 나를 세워놓고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나는 처음 몇 마디는 들어주었다. 그러니 그 사람들은 자기 따라 가면 좋은 곳에 간다며 나를 끌어당긴다. 나는 그래도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은 경험이 있어서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설득하려고 집요하게 접근을 하고 있었다. 나는 빨리 그 상황을 벗어나고자 그들에게 말했다. “내 얼굴을 보고 말해라. 내 얼굴이 니 말을 듣게 생겼냐”고 하니 그 제서야 더 말을 하지 않고 나를 놓아준다. 학원에 와서 이야기하니 학원 학생들이 하는 말이 그런 사람들은 사이비 종교라 나쁜 거라고 하면서 나를 보고 절대 따라 가면 안 된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렇게 몇 차례 안 좋은 일만 겪다 보니 어느 순간에 내 마음 속에 한국에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는데 어찌 보면 나쁜 사람이 더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학원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살아갔다. 학원에만 있을 때는 잘 못 느꼈는데 사회에 나오니 탈북자들을 색다르게 보는 눈길이 내 피부를 통해 뼛속까지 스며들어왔다. 그러다보니 내 처지를 아는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는 아무 일 없는데 내 신분을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하면 북한말을 안 하고 한국말만 하려고 신경을 쓰다 보니 말을 더듬는 증상이 생겼다.

미용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날 여자 손님 머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손님의 나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본다. 나는 “강원도.”라고 이야기 했다. 여자 손님은 나를 보면서 “강원도 어디?” 하고 다시 물어본다. 나는 “강원도 철원요.” 하고 말 했다. 그러니 손님이 하는 말이 나도 “강원도 철원이 고향인데 그곳에 말투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뿔싸. 어쩌다 이곳에서 강원도 철원 사람을 만난단 말인가. 나는 부끄러웠다. 더 이상 거짓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솔직하게 북한에서 왔다고 이야기 했다.

그렇게 한국생활 3년차에 접어들었을 때 우리 집에 카롤라 수녀님이 우리 집에 방문하였다. 수녀님은 한국에서 생활하는데 어려움이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시면서 “이승희 씨 지금 살아가면서 제일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 나는 수녀님께 “수녀님, 저는 다른 것은 하나도 불편하거나 힘든 것이 없고 단지 밖에 나가면 나를 색다른 안경을 끼고 보는 것이 제일 싫어요.”라고 말씀 드렸다. 수녀님은 조용히 나에게 “승희 씨는 항상 탈북자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승희 씨가 탈북자라는 신분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면 그때는 남한 사회에서 낙오자로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 탈북자라는 신분을 극복하고 그것을 이겨내야 남한 사회에서 성공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라고 말해 주셨다. 그러시면서 그 예로 이스라엘 역사를 내게 이야기 해주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몇 백 년을 다른 나라의 노예로 살아가면서 지금의 이스라엘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이스라엘 선조들이 역사를 후대들에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작지만 지금은 세계에서 제일 많은 노벨상을 많이 받는 나라이다. 노벨 수상자의 약 4분의 1이 유대인이다. 유대인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습관처럼 이스라엘 역사를 배운다.

수녀님의 말씀을 듣고 나는 생각을 바꾸었다. 그러니 차츰 말을 더듬는 증상도 나아져 갔다. 나는 어렵고 힘들 때마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아버님과 오빠 그리고 가슴 아픈 지난날을 생각하면서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북한이탈주민들은 대부분 북한에서 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싫어하고 있다. 자유롭고 안정된 생활을 꿈꾸며 목숨 걸고 북한을 탈출해 갖은 고생을 무릅쓰고 한국에 왔지만 막상 와서 보니 주위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거나 무시를 당하면서 한국 사회에 적응해 나가기 어려워한다. 지금 한국 정부에서 현행 지원 제도가 체계적으로 북한이탈주민의 적응을 잘 돕기 위해 다양한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정부의 북한이탈주민을 위한 지원 체제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북한이탈주민들이 살아가야 할 이 땅(대한민국)에서 본인들이 끊임없는 노력과 자기계발을 하여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흔히 탈북민들은 먼저 나온 선배가 “어디가 월급 많이 주고 좋더라.” 하면 그런 말을 듣고 직장을 자주 옮기는 현상이 주위에서 빈번히 발생한다. 정작 본인들이 가치는 높이지 않고 회사가 월급만 많이 주기를 바란다. 그러다 보니 한곳에 오래 못 있고 월급 많이 주는 곳을 쫒아 다니는 데만 열을 올린다.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에서 벤자민 프랭클린은 이렇게 말했다.

“자주 옮겨 심은 나무와 자주 이사 가는 가정은 꾸준히 제자리를 지킨 나무나 집안보다 절대 번성하지 못한다. 세 번의 이사는 한 번의 화재와 같다. 그러니 당신의 일터를 지켜라. 그러면 그 일터가 당신을 지켜줄 것이다.”

얼마 전에 TV에서 탈북자들에 대한 뉴스를 보았다. 사회에 적응하기 힘들어 마약을 하며 티켓 다방에서 전전긍긍하면서 살아가는 뉴스를 보면서 나는 안타까웠다. 저들은 무엇이 부족해서 저렇게 밖에 못 살아갈까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몇몇 탈북자들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잘살아가고 있는 탈북자들까지 욕되게 하는 것 같아 속상했다.

리오 버스칼리아가 쓴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책에 이런 문구가 나온다.

신은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재능을 살리지 못한 채 힘든 인생을 사는 것은, 남의 물건을 훔치고 타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만큼이나 신에게 죄를 짓는 노릇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그 달란트를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편한 길만 택한다. 그리고는 몇 십 년이 흐른 뒤 ‘내가 원했던 인생은 이게 아닌데…….’ 하면서 후회한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탈북자들은 타국에서 수많은 시련과 역경을 이겨내고 북한보다 나은 삶을 찾아 남한에 왔다. 처음부터 좋은 것만 바라고 많은 월급을 바라지 말고 누구나 자기에게 꼭 맞는 일을 찾아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 일에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성공은 본인의 선택이다. 얼마나 노력하는가에 따라서 그 승패는 달라진다. 어떤 일도 시련이나 고난이 없는 일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고난이나 시련을 이겨 나간다면 성공은 반드시 찾아온다. 어떤 성공도 시련이나 고난을 이기지 않고는 이룰 수 없다. 확실한 꿈과 희망을 가지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그 꿈을 향해 꾸준히 매진한다면 기회는 반드시 찾아온다. 탈북한 우리들보다도 더 어려운 상황에서도 불구하고 희망을 품고 꿈을 가꿔나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너무 늦어서 못할 일이란 없다. 진정으로 그 일을 하고 싶다면 아직 늦지 않았다. 게으른 매미가 되고 싶은가, 아니면 부지런한 개미가 되고 싶은가? 선택은 우리의 마음에 달려있다.

나는 꿈과 희망을 잃고 좌절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작은 힘이나마 일조하여 그들의 꿈과 용기를 가지고 포기하지 않는 한 도전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희망에 목말라하고 꿈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메신저가 되고 싶다. 그리고 절망과 두려움에 지친 당신에게 위로와 희망의 증거를 보여주고 싶었다. 거친 세상 속에서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그들의 손을 잡아 주고 싶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기쁨과 행복 그리고 희망을 안겨주고 싶다.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으며 더욱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도 않는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주저 하지 말고 시작하라.

국정원에서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2009년부터 봉사를 하고 있다.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어 돌도 안 된 아이를 업고 다니면서 봉사를 시작했다. 봉사를 하다 보니 지금은 6개 단체에서 봉사를 하고 있다. 처음 봉사단체를 대상으로 하던 강의가 지난해는 지인의 소개로 가톨릭대학에서도 강의를 하게 되었다. 강의를 하면서 느낀 것은 요즘 젊은 세대들이 북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고 통일에 대한 생각도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앞으로 더 나아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북한의 실정을 알리고 싶다. 요즘 젊은 세대가 통일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통일보다는 현재 상태가 좋다는 생각을 한다. 젊은 세대에게 통일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과 필요성을 해결하기 위해서 통일의 주역이자 통일의 부담을 짊어져야 할 한국 대학생들과 북한이탈주민의 활발한 교류 활동에 앞장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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