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번영과 한일”
“동북아번영과 한일”
  • 나가노신이치로(다이토우분과대학 명예교수)
  • 승인 2018.12.09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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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한국에서 태어난 일본인이 본 '한일 상생의 길'

동북아 번영과 한일해저터널 건설

나가노 신이치로(永野慎一郎)

1. 문명의 순환 동북아시아시대로

고대문명의 발상지는 동양이었다. 세계4대 문명으로 알려진 메소포타미아문명, 이집트문명, 인더스문명, 황하문명은 동양에서 발생했다. 고대시대는 동양나라들이 선진국이었다. 문명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이동하여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가 있었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 즉 「로마의 평화」 라는 말로 쓰였다.

19세기에는 대영제국이 세계를 지배했다.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nica)이다. 산업혁명으로 발흥한 대영제국이 세계 각지에서 식민지를 경영하면서 세계 최강의 왕국으로 군림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대영제국이 지배하던 시대는 종결되었다. 영국 중심의 국제질서는 국제연맹의 창립으로 다극체제로 바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영국의 주도권은 완전히 상실했다. 대영제국의 영향력이 감소되면서 패권이 영국에서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이동했다.

제2차 대전 후부터 아메리카시대가 시작되었다.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 시대가 열린 것이다. 아메리카는19세기말에 독일 프랑스 영국을 제치고, 세계 제1위의 공업국으로 등장했다. 제2차 대전 후 미국은 막강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세계의 맹주 역할을 맡게 되었다. 유럽국 가들과 NATO를 결성하여 군사동맹을 매졌고, 아시아 태평양국가들과 UNZAS, SEATO, 일미안보조약, 한미안보조약 등을 맺어 세계적 규모로 공산권 국가들과 대치했다. 한편 소련은 공산권 국가의 맹주로서 군사적으로 미국과 대결했다. 미국과 소련 중심의 양극체제가 형성 되었다. 1990년대 초기에 소련이 자멸하자 미국의 일극체제로 되었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전성기는 대서양 시대였다. 미 대륙의 동해안에 위치하고 있는 뉴욕과 워싱턴D.C.가 아메리카합중국의 현관으로 정치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대서양시대를 상징 하듯이 미국의 정치 경제의 주요 파트너는 유럽 국가들이었다. 일본 한국 중국 등 아시아태평양지역의 국가들이 급속히 경제성장하면서 미국을 추격했다. 미국과 아시아태평양 나라들과의 경제교류가 활발해졌고 무역양이 유럽 국가들을 초월함으로서 미국 내 경제 중심이 동해안에서 서해안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서해안의 중심도시인 로스앤젤스와 샌프란시스코가 각광을 받게 되었다. 서해안지역의 경제 활성화에 따라 아시아태평양지역과의 관계가 중요하게 되었다. 대서양시대에서 태평양시대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일본 한국 중국 인도 등 아시아 국가들이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국제사회에서의 지위가 향상되었고, 발언권이 강해졌으며 이에 따라 미국의 대외정책도 아시아 태평양 중심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미국의 영향력이 저하되면서 초강대국으로서의 역할이 한계에 직면했다. 미국이 초강대국으로서의 역할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팍스 아메리카나시대에 빨간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부르짓고 있는 아메리카 퍼스트가 그 현상이다.

그러나 미국을 대신할만한 국가가 현재 아시아지역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제일 먼저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국가는 일본이다. 그러나 일본이 미국을 대신할 수 있는 리더십을 발휘할 만한 조건이 구비되어 있지 않다. 중국은 충분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나 현재의 정치 경제적인 상황으로 보아서는 그만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없다. 당분간은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팍스 아메리카나를 계승할 수 있는 국가는 정치 경제 군사적인 면에서 세계 최강국으로서의 실력을 갖춘 국가여야 한다. 즉 정치대국 경제대국 군사대국이란 조건을 구비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없으며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없다. 국제사회를 둘러싼 현재의 시대상항은 단일국가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평화와 안정에 기여할 수 있는 초강대국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새로운 리더는 새 시대의 국제질서에 적응할 수 있어야 하며 자국의 이익 만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공생공영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또한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할 수 있는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리더십을 구비하는 것이 한국 중국 일본의 협력관계의 과제이다.

2. 상호의존의 한일관계

제2차 대전직후 일본은 정치 경제적으로 곤란한 상태에 있었다. GHQ(연합국 사령부)의 점령 하에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면서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미소 간의 대립에서 발생한 동서냉전이 시작되면서 전쟁이 끝난 지 5년이 지났어도 일본은 연합국과 강화조약을 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독립국이 아니었다.

1950년에 발생한 한국전쟁이 일본의 정치적 독립과 경제적 부흥의 계기가 되었다. 한국전쟁 지원에 필요한 미군의 특수가 일본경제를 살려준 것이다. 한국전쟁 특수란 즉 한국전쟁 전선에 출동하는 유엔군(주력은 미군)의 장병에게 보급하기 위한 물자 또는 용역 서비스를 매입하는 것을 말한다. 미군의 특수로 인해 가장 혜택을 얻은 업계는 자동차업계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혜택을 입은 기업은 토요타자동차였다. 토요타자동차는 도산에 직면해 있었다. 어려운 시기에 운 좋게 한국전쟁이 발생하여 전쟁특수로 인해 회생한 기업이다. 자동차업계는 토요타자동차 뿐 아니라 닛산, 이스즈 등이 큰 혜택을 얻었다. 그 외에도 섬유업계, 철강업계, 조선업계, 광공업계 등이 혜택을 받았고, 한국전쟁 특수 붐이 일어나면서 소비 붐이 일어났다. 국민경제 전반에 특수효과가 있었다.

일본에서의 미군관련 특수는 1950년 7월부터 시작해서 1958년 12월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간의 특수계약 총액은 22억 5,065만 달러 즉 8,102억엔이었다. 전쟁특수가 일어나기 전인 1949년의 일본의 국민총생산은 3조3,752억원이었다. 한국전쟁이 휴전한1953년에는 7조1,562억원으로 상승했다. 그 기간에 2배 이상 상승한 것이다. 한국전쟁 특수효과가 국민생활 전반에 파급된 것이다. 이처럼 한국전쟁이 일본경제에 미친 영향은 컸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미국 주도로 대일 강화조약을 서둘렀다. 한국전쟁 진행 중인 1952년4월에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은 명실공이 독립국이 된 것이다.

1965년의 한일국교정상화는 한국의 경제발전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국교정상화로 인해 일본에서 도입한 청구권 및 경제협력자금은 한국 산업화의 기반조성에 큰 도움이 되었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정권은 재정이 궁핍했을 뿐 아니라, 기술도 경험도 없었다. 박정희장군은 한일국교정상화로 일본으로부터 받을 청구권 자금에 주목했다. 돈은 필요할 때 받아서 유용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한일회담을 서둘렀다. 불리한 조건을 감수하면서도 정치적인 타결을 꾀했다.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일본외상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사이에 합의된 「오히라・김 메모」에 따라서 한일 양국 정부는 개인배상 등을 포함하여 일괄해서 무상3억불 유상2억불을 10년간 분할해서 지불하기로 합의했다. 그것도 당시 일본은 재정적인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현금이 아니고 생산물 또는 용역으로 지불한 것이다. 한국정부로서는 재정사정이 어려운 시기였으므로 저자세외교라고 반대하는 야당 및 시민 학생들의 목소리를 무시하면서 강행했던 대일외교였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였던 당시의 한국의 경제사정으로 생각하면 별수 없었다. 이것이 배상문제는 법적으로 해결했다는 일본 측 주장의 근원이다.

1966년부터 1975년까지 10년간에 걸쳐 일본에서 도입된 대일청구권자금이 유용하게 사용되어 산업화의 기반조성에 도움이 되었다. 대일청구권자금은 경부 고속도로 건설, 소양강댐 건설, 포항종합제철소 건설 등 기반산업 건설에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동시에 국교정상화후 재일교포들의 모국방문이 자유롭게 되면서 재일 한국인들이 모국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일본에서 피땀을 흘리며 축적한 재산을 반입하는 한편 본국투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자금 환류 및 기술이전이 신생 한국의 경제발전에 다대한 공헌을 했다는 사실이다.

한국 최초의 수출산업공업단지 ‘구로공단’의 초기 입주자의 3분의2는 재일교포 기업이었다. ‘구로공단’에 입주한 재일교포 수출기업은 일본에서 축적한 선진기술 및 해외시장에 대한 노하우를 전수했으며 초창기는 섬유 봉제 가발 전기 등 경공업 분야를 중심으로 한국의 수출을 견인했다. 한국의 재정사정이 어려운 시기에 외화 벌이에 큰 공헌을 했다.

한국의 경제성장으로 인해 많은 이익을 얻은 것은 일본이다. 대일청구권자금 도입으로부터 시작한 한국의 산업구조가 일본 의존 형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생산기반이 일본을 모델로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제조설비를 일본에서 도입했고, 부품소제도 일본에서 구입했으며, 일본에서 자금 조달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경제가 성장할수록 대일무역이 활발해졌고, 원자재수입 등 대일수입이 증가되게 되었다. 경제 환경이 좋아짐으로서 일본이 이익을 얻게 되는 경제구조였다. 그 결과 한국의 대일무역이 만년적자로 나타났다. 이것은 후진국이 가진 운명이기도 한다. 이러한 과제는 한국 기업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상당 부분 해결되었으며 삼성전자 같은 일부 기업들은 일본기업을 추월해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

일본의 경제성장은 한국에게는 좋은 모델이 되었다. 생활 풍습이 비슷함으로 일본이 개척한 기술이나 경험은 많은 참고가 되었다. 뒤 따라가는 기업은 용이하게 단기간에 기술취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본이 미국에 비해 유리한 저물가 저임금은 그 뒤를 따라가는 한국에게는 더 유리하다는 점이였다. 한국은 유리한 점을 활용하면서 경험을 쌓고 기술을 축적하여 경쟁력을 강화했다.

3. 동아시아지역의 경제발전

한・중・일3국의 인구는 15억6,466만명으로 세계인구의21%이다. 3국의 명목GDP는 18조6,406억달러로 전세계GDP의23%를 차지한다. 또한 세계무역량의 18%를 이 세 나라가 점유하고 있다. 한국 중국 일본3국은 인구 GDP무역 등의 경제규모에서 세계전체의2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표-1〉 한・중・일3국의 경제규모

한 국

일 본

중 국

세 계

3국 점유률

인구 (만명)

5,145

12,675

139,008

737,479

21.3%

명목GDP(억US$)

15,405

48,732

120,146

799,441

23.1%

1인당GDP(US$)

29,938

38,449

8,643

10,715

무역   수 출

수 입

4,954

4,062

6,449

6,069

20,982

15,874

159,564

161,415

20.3%

16.1%

합계 (억US$)

9,016

12,519

36,856

320,979

18.2%

【출처】 인구 ・GDP:IMF(2017년),  무역:UNCTAD(2016년)

일본은 1990년에 1인당 GDP가 25,000달러를 넘었다. 이미 선진국이 되었다. 때문에 2017년까지 27년간에 GDP가 1.6배 상승에 그쳤다. 한국은 2000년에 1인당 GDP가 12,000달러, 2010년에는 22,000달러로 증가하고, 2017년에는 30,000달러에 육박했다. 27년간에 GDP가 5.5배 증가한 것이다. 중국은 1990년의 1인당GDP가 349달러였다. 2017년에는 8,643달러로 증가했다. 그간의 GDP가 30배나 상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의1인당 GDP는 한국의 3분의1이 못되고 일본의 4분의1이 못된다. 일본 한국과의 격차가 좁혀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본과 한국 사이도 격차가 좁혀졌다. 한국이 일본을 추월할때가 올지 모른다. 또한 중국이 한국 일본을 추월할 날이 언젠가 올지 모른다.

〈표-2〉한중일3국의GDP의 추이

단위:억US$, US$(1인당)

한 국

일 본

중 국

명목GDP

1인당GDP

명목GDP

1인당GDP

명목GDP

1인당GDP

1990

2,792

6,513

31,101

25,196

3,986

349

2000

5,616

11,947

48,873

38,534

12,149

959

2010

10,945

22,087

57,001

44,674

60,664

4,524

2017

15,405

29,938

48,732

38,449

120,146

8,643

【출처】IMF각년도

한・중・일 3국이 형성하고 있는 동북아경제권은 유럽경제권 및 북미경제권과 함께 세계3대 경제권의 하나이다. 동북아경제권은 경제규모로 보아도 다른 경제권에 비해 손색이 없다. 동북아경제권의GDP가NAFTA를 추월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무역액은 넘었다. EU의 무역액이 많은 것은 역내무역이 비관세이기 때문이다. NAFTA도 마찬가지다.

〈표-3〉 지역경제통합체의 비교

단위:억US$, US$(1인당)

가맹국

인구(만명)

G D P

1인당GDP

무역(수출+수입)    

ASEAN

10

64,739

27,671

4,274

  25,774

E U

28

51,246

172,777

33,715

117,030

NAFTA

3

49,159

221,936

45,146

56,188

한・중・일

3

156,466

186,406

11,913

  61,936 ※

【출처】 인구・GDP: 세계은행(2017년), 무역:IMF(※2016년)

2017년 말 현재, 중국이 보유하고 있는 외화는 3조2,354억 달러이고, 일본은 1조2,640억달러, 한국은 3,888억 달러이다. 한・중・일3국이 보유하고 있는 외화가 4조8,881억 달러로 세계 각국의 외화보유액 전체의 34.46%를 점유하고 있다. 동북아시아지역이 지구상에서 가장 돈벌이가 좋은 지역이다. 경제규모가 거대할 뿐 아니라 이 지역이 세계 최대시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의 경제잡지 『포춘(Fortune)』이 선정한 2017년의 「글로벌 기업500」에 따르면 세계의 기업 중 상위500대 기업에 중국 105개 기업, 일본 51개 기업, 한국 15개 기업이 들어 있다. 홍콩 4개 기업, 대만 6개 기업을 합치면 동북아시아 지역 기업이 181개나 된다. 세계 대기업의 36%가 동북아시아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상위100대 기업에는 중국19개 기업, 일본8개 기업, 한국3개 기업, 합계30개 기업이다. 세계100대 기업에는 미국 기업이 37개 기업이 자리 잡고 있다.

 〈표-4〉 「글로벌 기업500」의 국가별 기업수

일 본

 한 국

 중 국

 미 국

1995

149

   8

   3

 151

2007

67

  14

  24

 162

2012

 68

  13

  73

 132

2017

  51

15

 105

 132

【출처】“Fortune Global 500”각년도

포춘이 조사를 시작한 1995년에는 중국이 3개 기업에 불과했고, 일본이 149개 기업으로 미국의 151개 기업에 육박했지만, 그 후 일본기업수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으며, 미국 기업수도 2002년을 피크로 감소경향이다. 대조적으로 중국기업 수가 급증하여 2012년에는 일본 기업수를 추월해서 제2위로 올랐다. 미국과 일본이 감소된 대신 상대적으로 중국과 한국 등 신흥국가들이 증가하고 있다.

〈표-5〉 세계주요국가의GDP성장율의 예측

단위:%

2017년

2018년(예측)

2019년(예측)

세 계

3.7

3.9

3.9

선진국

2.4

2.4

2.2

미 국

2.3

2.9

2.5

일 본

1.7

1.0

0.9

한 국

3.1

2.8

2.6

아시아신흥국

6.5

6.5

6.3

중 국

6.9

6.6

6.2

인 도

6.7

7.3

7.4

【출처】IMF에 의한2018년10월 발표치

선진국들이 겨우2%대의 경제성장률을 올리고 있는 상항에서 아시아 신흥국 및 중국은 6%대의 성장률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은 1% 정도이고 한국은 2%대이다. 이러한 추세가 계속된다면 중국 인도 등의 성장에 힘입어 아시아지역의 경제규모는 더 확대될 전망이다. 동북아시아지역이 세계의 공장역할을 하고 있으며 성장센터 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선진기술을 축적하고 있는 일본, 풍부한 인적자원 및 잠재력을 가진 중국, 도전정신이 강한 한국, 이 세 나라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공유하면서 서로 보완하고 활용하게 되면 동북아시아지역 전체가 더욱 발전을 기할 수 있다. 한・중・일3국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서로 협력하여 동아시아공동체를 만들게 되면 팍스 아메리카나를 계승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다.

4. 상호교류의 확대

경제발전에 따라 물적 교류와 함께 인적 교류가 활발해 졌다. 한・중・일3국을 왕래하는 상호방문자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2016년에는 한국과 일본의 상호 방문자가 739만명, 한국과 중국의 상호방문자가 1,303만명, 일본과 중국의 상호방문자가 896만명이다. 한・중・일 3국의 상호 방문자가 2,938만명이다. 년간 3,000만명의 한국 중국 일본의 3국 국민이 상호방문하고 있다는 것이다. 2017년에는 더욱 증가했다. 한일 간 상호방문자가 945만명이였다. 특히 중국 및 한국의 일본방문객이 급증했다. 중국인 방문객이 736만명, 한국인 방문객이 714만명으로 각각 700만명을 넘었다.

2017년에는 중국인의 한국방문이 감소되었고 그 대신 일본방문이 증가했다. 또한 한국인의 일본방문은 증가했으나 일본인의 한국방문은 저조한 상태이다. 최근에 영토문제 및 역사인식문제가 정치적인 쟁점으로 부상하여 언론에 자주 보도됨으로서 국민감정이 악화되고 있으며 이러한 사실들이 반영된 것이다. 한국인들은 시간이 지나면 그냥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으나 일본인들 은 주시한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당시에는 한일 양국을 왕래하는 사람이 연간 10,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2017년에는 1,000만 명에 달하고 있다. 50년 사이에 1,000배로 증가되었다는 것이다. 하루 평균 27,000명이 한국과 일본을 왕래하고 있다.

한일 양국의 교류가 활발하게 된 것은 1998년의 김대중 정권의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었다. 한국은 일본의 음악 영화 만화 등 대중문화의 유입을 금지했다. 일본의 CD 및 영화가 자유롭게 들어오게 되면 일본제품이 한국시장을 석권하여 한국의 대중문화가 육성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김대중 정권은 일본대중문화의 개방과 동시에 문화유출을 추진했다. 또한 2002년 월드컵 공동주최를 계기로 민간교류가 확대되었다. 축구 팬 뿐만 아니라 많은 일본인이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음식을 즐기고 한국문화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한 조류에서 2004년에는 배용준 주연의 한국TV드라마 〈겨울연가〉가NHK에서 방영되어 히트 쳤다. 배용준 팬들이 배용준을 쫓아다니는 현상이 일어났다. 배용준을 「용사마」라고 불러 일본에서 「용사마붐」이 일어났다. 또한〈대장금>이 여성 팬 뿐만 아니라 남성 팬도 획득함으로써 폭넓은 인기를 얻게 되었다.〈주몽〉〈황진이〉등 한류 시대극이 계속해서 인기를 얻었다. 그 결과 일본에서 한류 붐이 일어났고, 한국 에서도 일본붐이 일어나 양국 간의 왕래가 빈번해졌다. 그 배후에 있는 문화교류가 쌍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한류 붐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카라 소녀시대 동방신기 등의K-POP을 중심으로 제2차 한류 붐이 일어났다. 최근에는 K-POP 뿐만 아니라 음식 미용 패션 등 한국문화가 포함된 제3차 한류 붐이 일어나고 있다. 한일 양국 간에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스포츠 등 폭 넓은 분야에서 교류가 진전되었다.

이러한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1998년 10월, 도쿄를 공식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渕恵三)일본총리에 의해 발표된「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이였다. 정상회담에서 오부치 총리는 금세기의 한일관계를 회고하면서 일본이 과거 한 시기 한국 국민에 대해서 식민지 지배로 인해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끼쳐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이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함께 진심으로 사과를 드린다고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오부치 총리의 역사인식 표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평가함과 동시에 양국이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초월해서 화해와 선린우호협력에 기초한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서로 노력하는 것이 시대의 요청이라고 말했다.

5.동북아시아 평화와 공동번영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는 한・중・일 3국의 협력체제 구축이 중요하다. 한국 일본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라는 공통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특히 정치와 안전보장분야에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국 일본이 동맹관계를 맺고 있다. 또한 경제 분야에서는 한국 일본 중국이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다. 정치적인 동맹과 경제적인 유대관계가 상존하고 있다. 국가 생존을 위해서 는 어느 쪽도 버릴 수 없는 관계이다.

정치적으로는 한국 일본 미국이 하나의 그룹을 형성한다. 경제적으로는 한국 일본 중국이 다른 그룹을 형성한다. 양 그룹에 속해 있는 나라가 한국과 일본이다. 이와 같이 한국과 일본은 공통점이 있다. 지금 세계는 미국과 중국이 패권을 다투는 상항이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에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맡길 수는 없다. 한국과 일본이 힘을 합치고 협력해서 미국과 중국의 양대국 사이에서 균형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중국을 끌어들여 한・중・일 3국의 협력 체제를 구축하여 그것을 기반으로 동아시아공동체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한국과 일본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동아시아공동체구상은 유럽연합(EU)이1952년에 설립된 유럽석탄철강공동체 (ECSC)로부터 시작했다는 EU의 역사에서 배울 점이 많이 있다. 프랑스와 독일은 국경지대에 있는 석탄 및 철강 광산의 경영권을 둘러싸고 세 번이나 큰 전쟁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의 규모가 커졌으며 다시 전쟁이 일어나면 공멸한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고, 프랑스와 독일이 전쟁을 회피하는 방안으로서 국경지역의 석탄 및 철강의 광산을 공동 관리하고 공동경영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프랑스의 사상가 쟌・모네의 제안이었다. 이 구상을 프랑스 외상 로베르・슈만이 받아들였고, 슈만의 제안을 서독 수상 콘라트・아데나워가 찬동했다. 주변 나라들도 동참했다. 프랑스 서독과 함께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가 참가해서 6개국이 ECSC를 설립했다. ECSC가 오늘의 EU의 출발이다. 다시 6개국이 1958년에 유럽경제공동체(EEC)와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를 설립했고, 이 3기관이 통합해서 1967년에 유럽공동체 (EC)로 발전했다. EC에 영국 등 서유럽 나라들이 추가 가맹하면서 확대 EC로 발전했으며, 1993년에 유럽연합(EU)이 탄생했다. 그 후 구소련의 붕괴 및 동유럽 나라들의 민주화가 추진되는 등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중부 유럽 및 동부 유럽 나라들이 대거 EU에 가맹했다.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EU 가맹국이 되었다. 현재 탈퇴를 결정한 영국을 포함해서 28개국이 가맹국이다. EU는 경제통합기구로 시작해서 정치통합기구로 발전되고 있으며「유럽의 공통의 집」 을 목표로 하고 있다.

EU 탄생의 계기는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지대에 있는 석탄 철강 광산의 이권을 둘러싼 분쟁해결의 수단으로서 시작한 유럽석탄철강공동체의 설립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영토문제가 분쟁의 화근이 되어 있는 한・중・일 3국에게도 지혜로운 해결의 방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국주의시대는 영토문제는 힘으로 해결했다. 현대는 군사력이 막강하기 때문에 전쟁으로 해결하기는 어렵다. 전쟁이 일어나면 공멸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편협한 내쇼널리즘에 의도적으로 편승하는 수도 있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수도 있지만 올바른 판단을 못하고 재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외교관계는 이해관계가 상반되는 국민 여론을 배경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방적인 주장만 가지고는 해결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교섭이 필요하고 타협이 필요하다. 대국적인 면에서 상대방의 입장도 고려하면서 적절한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또한 일본과 중국 사이에 역사인식문제 영토문제 등을 둘러싸고 갈등이 있다. 서로 상반된 국내여론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과거의 역사를 성찰하고 미래를 지향하면서 지혜로 풀어나가도록 서로 노력해야 한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연결되어 국제화된 문제인 만큼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면서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눈앞의 이익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얻을 수 있는 국익을 찾아야 한다.

오랜 역사에서 보면 양국 관계가 좋은 때도 있었고 불편한 때도 있었다. 국가 간의 문제는 외교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외교는 교섭이다. 외교교섭에서는 주는 것도 있어야 하고 받는 것도 있어야 한다. zero-sum”이 아니고 “plus-sum”이어야 한다. 상생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역사문제에 관해서는 사실관계가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고 해석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 자기 주장만 옳다고 생각하고 상대방의 주장은 일절 무시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자타 간에 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해야 한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진실을 추구하고 잘못이 있었다면 인정하고 또한 용서하는 자세도 중요하다. 과거의 어느 한 시기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큰 틀에서 새로운 미래를 함께 구상하며 무엇이 국가와 인류를 위해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양 국민이 공유할 수 있는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현재 한일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양 국민 간의 신뢰관계의 구축이다. 신뢰관계 구축은 상대방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또한 존중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기가 상대방을 존경함으로서 자신도 존경 받게 되는 것이다. 과거의 불행한 역사관계로 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는 노력도 없이 상호간에 오해를 가지고 있는 부분이 많이 있다. 상대방의 나쁜 점만 부각시키지 말고 좋은 점도 인정해 주면서 인내심을 가지고 교섭에 임하고 대화함으로서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타협이 안 되고 결렬됨으로서 감당해야 할 손실 보다는 성립됨으로서 얻게 되는 것이 더 많다. 상대방의 약점이나 상처를 내세워 그것을 비판하면 불쾌하게 생각하며 그것을 감추려고 반항하게 된다. 본인들도 약점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다. 스스로 고치도록 유도하는 방법이 현명하다.

일부 매스콤의 무분별한 보도에도 책임이 있다. 조그마한 사건을 과장해서 보도하면 시청자들은 그것이 전체인 것처럼 인식한다. 착각에 의한 잘 못된 인식이 많이 생긴다. 이것이 국민감정을 악화시키는 큰 원인이다. 이러한 잘 못된 인식을 시정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두터운 신뢰를 쌓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오랜 기간을 걸쳐 쌓아온 신뢰관계를 허물어뜨리는 것은 간단하다. 그럼으로 책임 있는 지도자들의 언행은 신중해야 한다. 포풀리즘에 영합하는 발언과 행동은 일시적으로는 효과를 느낄 수 있을지 모르나 국익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해를 풀고 신뢰관계조성을 위해서는 상호교류가 필요하다. 교류를 통해 상대방의 문화와 풍습 습관 등을 직접 체험함으로서 차이를 이해하게 되고 문화의 장단점을 판단 할 수 있으며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아이디어도 생긴다. 세계 속의 자기 나라이고 세계 속의 자기 문화라는 것을 알게 된다. 개발도상국은 선진국에서 배우고 선진국을 모델로 열심히 뛰며 선진국을 캐치업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성과에 따라 선진국을 추월할 수도 있다. 선진국이라 해서 언제까지나 선두의 위치를 유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노력에 따라서 서열이 바뀌어 진다.

한중일 3국정상이 한자리에 모여 대화를 하게 된 것은 1999년 11월에 마닐라에서 열린 ASEAN+3정상회의부터이다. 오부치 게이조(小渕恵三) 일본총리의 제안으로 조찬회를 가진 것이 한중일정상회의 시작이다. 그 후 매년 ASEAN+3 정상 회의 때마다 한중일3국 정상이 조찬회를 가졌다. 2008년부터 한중일정상회의가 매년 세 나라에서 돌아가면서 개최하게 되었다. 6차까지 진행되었으나 그 후 영토문제 역사인식문제 등으로 일시 중단되었다가 2018년 5월, 도쿄에서 재개되었다.

정상회의가 못 열리는 자체가 비정상적이다. 정상들이 자주 만나 흉금을 털어 놓고 교류하고 대화하면서 대국적인 면에서 문제해결점을 찾아야 한다. 정상뿐만 아니라 장관급 고급관리 경제단체 사회단체 시민단체 학계 언론계 등 청소년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의 교류가 중요하다. 각 계층 간의 교류를 통해서 신뢰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특히 한반도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일본과 중국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북한의 핵 및 미사일문제 뿐만 아니라 한반도통일문제는 일본과 중국의 관심이 크고 이해관계가 걸려있다. 서로의 이해관계와 역할을 확인하면서 해결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한국이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이해관계를 조정하면서 3국의 협력에 의한 동북아시아지역 전체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시스템 안에서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새로운 동북아시아시대는 복합화시대가 되어야 한다. 냉전시대의 사고방식에서 탈피하고 새로운 시대에 부합하는 복합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 한중일3국이 공동으로 복합네트워크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복합네트워크는 동북아시아지역의 공생을 위한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동북아시아지역의 정부 지자체 교육기관 언론기관 기업 각종 단체들이 정치 경제 문화 정보지식 과학기술 학술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의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이것이 실현되면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에 공헌하게 되며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국제질서가 형성될 것이다. 이러한 실질적인 작업을 통해 동아시아공동체의 기반조성이 된다. 한반도 통일문제도 이러한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질서 안에서 해결할 수 있다.

동북아시아지역의 미래를 개척하는 것이 한중일 3국 지도자들의 당면 과제이다. 자기 나라만 살겠다는 사고방식은 버려야 한다. 주변 나라들과 사이좋게 힘을 합쳐 공생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현명한 시책이다. 이것이 진짜 국익이 된다. “zero-sum”이 아니고 “plus-sum”으로 생각해야 한다.

6. 한일해저터널의 역할

한일 양국 간에 경제 문화 예술 스포츠 등 폭 넓은 분야에서 교류가 진전되고 있다. 연간 1000만명을 넘는 양국 국민이 한국과 일본을 왕래하고 있다. 양국을 왕래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항공편을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한일 간에 해저터널이생기면 철도나 도로를 이용해서 자유롭게 간편하게 왕래 할 수 있게 된다. 인적 교류의 증가뿐만 아니라, 물류의 수송이 쌍방향으로 이동 함으로 경제적 효과는 더욱 커질 것이다.

한일해협 중심지로부터 500km 권내에 있는 지역, 즉 일본 측의 큐슈(九州)·쥬고쿠(中国)·시고쿠(四国)·긴키지방, 한국측의 남한의 거의 전 지역이 한일 터널을 활용 할 수 있는 지역이다. 이러한 지역은 해저 터널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경제권이 된다. 또한 철도망이 군사경계선을 넘어 북한지역을 경유해서 시베리아 철도까지 연결되게 되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될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공동체 실현에도 탄력이 생길 것이다.

한일터널의 중심지인 대마도로부터 500km 권내에는 한일 양국의 약 8천만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1000km 권내에는 3억8천만명이며, 1500km권내에는 8억4천만명, 2000km권내에는 11억2천만명으로 증가된다. 파급 효과는 더욱 커질 것이다.

한일 터널이 건설되면 사람의 왕래 화물의 이동 차량의 운행 등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하게 된다. 선박이나 비행기를 이용하는 것보다도 터널을 이용하는 것이 선박보다는 빠르고 비행기보다는 비용이 싸기 때문에 쉽게 이용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한일 터널은 사람과 화물의 양쪽모두의 교통 수요에 대응 할 수 있어야 한다. 영불해협 터널에서 실증된 카트레인방식의 셔틀열차를 해저 터널부분에 달리게 하여 도로 기능을 겸비하는 철도 터널로 만드는 것이 현실적이다. 이 열차는 하이웨이 트레인으로서 신간센 및 KTX와 같은 수준의 속도로 달릴 수 있으며 시간 단축의 효과가 기대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한일 해저 터널의 루트 선정이다. 한일 터널의 루트 선정은 터널의 건설비를 구체적으로 작성하는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일한 터널 연구회가 다각적으로 연구한 결과 새로운 루트를 제안하고 있다. 일본의 후쿠오카(福岡)를 기점으로 가라쓰(唐津)~이키(壱岐)~대마도(対馬)~거제도(巨済島)~강서지구~부산에 이르는 루트이다. 카라쓰~부산간은 총 연장거리가 270km 이고, 카라쓰~부산 간의 해저부는 약150km이다.

터널의 시점・종점은 경제적으로 발달되어 있고, 교통이 편리하며, 인구가 집중된 도시를 선택할 필요가 있다. 루트의 선정에서는 이 터널이 해저를 통과해야 한다는 어려운 과제를 극복해야하기 때문에 건설과 보수의 관점에서 건설이 용이한 루트를 선택해야한다. 특히 해저부의 거리가 짧고 수심이 얕은 것이 중요하다.

한일해저터널루트의평면도

한일 터널 건설의 큰 과제는 공사비의 전망과 재원 확보의 문제이다. 단순한 계산으로 총 연장거리 270km의 공사비는 약10조엔(100조원)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 금액은 향후의 조사 및 계획 설계에 따라 변하겠지만, 하나의 목표로서 총 비용100조원, 공사기간 10년 정도를 전망하고 있다. 이 비용은 전 공정에 대한 총비용이다. 한일해저터널은 한일 양국의 합작 사업이기 때문에 양국의 실정에 맞추어서 분담해야 한다. 가라쓰에서 대마도까지는 일본영역이기 때문에 일본측에서 부담하게 될 것이며 부산에서 거제도까지는 한국 측에서 부담하게 될 것이다. 대마도와 거제도 사이가 한일 양국의 경계선이다. 이 구간의 비용은 반반으로 나뉘어서 계산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계산하면 한국측 부담은20%-30% 로 추정된다.

다음은 건설재원 확보문제이다. 한일 터널은 기본적으로는 한일 양국의 공공사업으로 추진하되 그 재원은 양쪽에서 지원하는 형식이 바람직하다. 장기 국채를 중심으로 한 자금 조달을 기본으로 하고, 국제적인자금 재단 등의 지원도 받으면서 장기 저리의 자금 플랜으로 프로젝트를 만드는 방법이 있다.

한일터널은 한일 양국의 공공사업으로 위치하게 하여 필요에 따라 유지 관리비도 함께 보증함으로써 경영의 안정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 때문에 인프라 건설과 보유는 공적주체가 담당하고, 운영은 민간이 맡아하는 상하 분리 방식의 도입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한일터널은 한국과 일본을 연결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북한을 통과해서 중국 동북 지방의 철도망으로 연결되어, 시베리아 철도를 경유해서 유럽까지 도달한다는 원대한 프로젝트이다. 북한을 통과 할 수 있게 되면, 북한에는 장소대여 값으로 통과료를 지불하게 된다. 그것이 북한에게는 경제적인 실리이다. 또한 북한의 개혁 개방을 유도하는 수단이 된다.

한일터널이 개통되어 도쿄역을 출발한 열차가 해저터널을 거쳐 부산에 건너가, 군사경계선을 넘어 한반도를 종단하여, 시베리아철도로 연결되게 되면, 그때는 북한의 개혁 개방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라고 예측 할 수 있다.

한일터널의 건설에 관해서 한일양국 정부 간에 공식적인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990년에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시작하여 한일정상회담 때마다 양국정상은 한일터널의 필요성에 언급했다. 그러나 국민적인 합의는 이루지 못한 상태이다. 실현을 위해서는 국민 각 층의 교류를 통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한일터널건설의 당면의 목표는 한일 양국의 경제교류의 가교역할이다. 또한 궁극적인 목적은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 및 공생공영의 길이다. 한일터널이 건설되면 사람의 왕래가 활발해지고 물류의 이동이 빈번해짐으로써 상호의존 관계가 깊어지게 될 것이다. 상호간의 경제적인 이득을 토대로 교류가 활발해 질 것이며, 상호이해가 깊어 가면 공통의 가치관이 심화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양국 국민이 서로 마음이 통하고 좋은 이웃으로 협력할 수 있는 관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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