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투병중인 동지에게 부치는 편지!
암 투병중인 동지에게 부치는 편지!
  • 대구경제
  • 승인 2019.02.10 23:05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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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베옷에 짚신 신고 싸워온 독립군이 연상되는 대기자 권동순...

 지난해 늦가을 언론 동료 권동순 형으로부터 청천병력과 같은 기별을 받았다.

“난 병이 들어 곧 골로 가게 생겼다.”

평소 건강한 체질에 일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왕성한 그이니, 마른하늘에 벽력이 휘몰아침이었다. 그것도 산다는 보장이 없는 폐암3기B라니.

 우리는 피 끓는 서른 전후의 청춘에 만나 서로의 속 까지도 다 안다. 쓴 글을 가차 없이 비판해도 뒤끝이 없이 달게 받아 들이는 우정과 믿음을 쌓아왔다. 세상 물정 모르는 이상주의자라고 나를 두들겨 패는 바람에 내 삶의 방식에 적잖은 도움이 되기도 했다.

소식이 뜸하다가도 미래비전과, 꿈에 관한 이야기를 메아리처럼 서로 던지기도 했던 30년. 5공 군사독재 시절 병들고 반(反)민주적인 세상을 고쳐 보자는 드높은 청운을 가슴에 지닌 ‘저항 세대’다. 뜻이 같으니 진정한 붕우(朋友)관계다. 재상자리를 관중에게 천거해 준 포숙이나 ‘뒤러의 기도하는 손’의 주인공 뒤러와 한스에는 못 미치지만...

 권형을 처음 본 것은 푸르디 푸른 젊은 시절이었던 1989년 봄 어느 날 경북일보 편집국에서다. 6.29언론자유 이후 한강이남 최초로 창간된 옛 경북일보 당시에는 대구에는 매일신문만 있었다.

거무스레한 얼굴빛은 언뜻 시골뜨기로 보였으나 뭔가 칼집을 차고 있는 듯 검객의 눈빛이었다. 나중 제2사회부 한 부서에서 일하며 알았지만 출신 성분이 안동시내 빈민의 아들이다. 1970년대식 말로 ‘어둠의 자식’이다. 다른 사람 운동화 신고 뛰는데 고무신 신고 모래주머니 차고 달리는 것 같은 균등하지 않은 악조건에서 인생을 출발했다.

 기자시절 열 기자도 당해 낼 수 없는왕성하고 야무진 기자였다. 나는 제2사회부 기자로 도내 30명가량 되는 주재기자의 기사를 정리하고, 부장이 없는 6개월간 데스크를 맡아봐서 잘 안다. 당시 권동순 기자의 살아 있는 현장 기사가 눈에 띄었다. 언론의 생명이 비판인 만큼 오래 고여 있던 안동사회를 뒤흔드는 그의 스킬풀한 비판적 기사를 마음껏 키워 지면에 활자화 했다. 지역 사회의 파장도 적지 않았다.

그 이후 매일신문에 스카웃 돼 간 이후에도 그의 센세이셔널한 기사는 줄곧 눈길을 끌었다. 지방 주재 기자지만 퇴직 무렵엔 향토음식 팀장으로 세계를 누비며 100여회 시리즈로 유종의 미를 거뒀다.

 밤낮으로 일한 결과 ‘안동간고등어’를 상품화해서 대(大)브랜드로 키웠다. 안동 역사 이래 다른 지방의 돈을 안동으로 처음 끌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척박하고 조용한 안동에서 작지만 계열사도 만들어 200억원 내외의 매출을 올리며 일자리를 만들어 수많은 가정을 먹여 살렸다. 내가 언론에서 잠시 나와 백두광학 경영과 영남대 출강을 하다 ‘안동간고등어’ 기업에 대표이사로 한 3년 있었기에, 끊임없이 뿜어대는 그의 아이디어와 인생철학까지 직접 접했다. 그 바쁜 가운데도 그는 연세대에서 석사를 받은 학구파로 정성이 담긴 저서도 냈다.

 거북이처럼 쉬지 않고 달려야 했던 그는 적잖은 성취를 했다. 성취의 크기가 크다는 것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성취 전에 전제 조건의 열악한 정도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한국에서 흙수저 인생은 자갈밭에서 인삼을 키우고,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피워내기만큼 고달프고 험난하다. 권형이 대구의 중산층 가정에서라도 태어났더라면 더 큰일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다음은 기해년 초열흘(14일)날에 마지막이 될 3차 항암치료에 들어가는 소식을 듣고 쓴 편지다.

 병상 신세인 권 형,

지금 죽을 만큼이나 힘 든다는 항암 투병을 한다니 뭔 말로서 위로를 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해 초겨울 서울로 수술하러 가면서 내게 던진 “폐암이라는 동아줄에 묶여 지금 서울병원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말은 정말 내 가슴을 후벼 팠습니다.

 옛날 시골에서 한 짐 잔뜩 지고 있는 아버지의 지게처럼 무거웠던 인생을 거뜬히 져 온 권형은 운명의 여신이 좋아하는 용기 있고 정의로운 남자임이 틀림이 없는데 웬 병치레란 말입니까.

와병 소식을 듣고 칼바람이 휘몰아쳐 오는 한 겨울 만주 벌판에서 삼베옷에 짚신을 신고 일제와 싸워온 독립군이 떠오르는 군요.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시련과 난관을 온 몸으로 돌파해 온 사람 아닙니까?.

 나를 멸시하고 모함한 사람들에 대해 분노 보다는 그저 말없이 뛰어 넘었고, 언제나 약자의 편에 서자는 야무진 꿈을 품고 서로를 채찍질 하며 일로매진해 오지 않았습니까?

‘내 생애 물리칠 수 없는 곤란은 없다’는 신념을 붙들고 살았으니 보란듯이 벌떡 일어나야 하지 않습니까?

 부디 쾌유하셔야 됩니다. 언젠가 내게 말한 “나는 염라대왕 앞에서도 맞장 뜰 자신감으로 이 세상을 산다”고 한 호기(豪氣)가 기억에 생생합니다. 병마와 정면으로 마주해 싸워 지구 밖으로 쫓아 내십시오.

그리고 이제는 쉬어야겠지요. 쉰다는 말이 체질에 안 맞을지도 모르니 말을 바꾸겠습니다. 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십시오. 나뭇잎이 앙상하게 다 떨어진 겨울 나목(裸木)처럼, 움직이지 않아도 큰 기운이 뿜어 나오는듯 이제는 정중동(靜中動)이지요. 늙어도 늙지 않는 나무처럼 말입니다

 항암치료, 혹한의 시베리아 바람을 발가벗고 홀로 맞는 느낌일까요.

권 형, 봄은 꼭 옵니다. 이 고비만 넘기면 반드시 옵니다. 완쾌와 치유의 봄 말입니다. 늘 오는 봄이지만, 올 봄은 권 형을 위하여 따스한 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권형이 분명히 완쾌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세상 무대에 인간 권동순이 필요한 배우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의 세상 통치에 들어 써야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숱한 고비마다 다 뛰어 넘을 수 있는 원천이 되지 않았을까요,

 또 하나 권형은 내 몸이 나아야겠다는 의지가 대단한 강골입니다. 스스로 의지가 굳센 사람의 경우 어떤 질병도 낫는다는 그 증거가 성경에도 수없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2천 년 전 이스라엘 땅에서 군중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입니다. 하나님은 권형이 지금 간절히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있다는 것을 아시기에 완쾌의 선물을 주실 것입니다. 그 놈의 병마를 털어내고 쾌차하면 사람들은 기적이라 말하겠지만...

 천하를 떠돌며 신들린 것처럼 예수를 전파하던 사도 바울도 병고와 싸워 오면서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했습니다. 이번에 병고로 약해졌지만 온전해지는 하나님 축복이 내리시길 간절히 빕니다.

 다시 강건한 소생의 세포들이 한 겨울 새벽 사뿐히 내리는 눈송이처럼 권형의 몸에 소복하게 내리기를 기원합니다.

항상 기적을 이뤄냈듯이 암도 물리치는 기적을 스스로 조용히 권형의 몸에서 만들어 낼 것으로 믿어요.

속히 병마를 쫓아내고 떨쳐 일어나소서!

기해년(2019) 정초에 김정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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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린 2019-02-14 16:34:49
제가 너무 존경하는 소중한 분이십니다.
꼭 나으실 거라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곽도경 2019-02-11 15:12:39
우리 삼촌 꼭 일어나십니다 믿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