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유토피아, 生命之村을 찾아 - 3. 감춰진 땅 예천 금당실
땅의 유토피아, 生命之村을 찾아 - 3. 감춰진 땅 예천 금당실
  • 금보리 논설기자
  • 승인 2019.05.01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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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 도읍지說 십승지 금당실은 기근, 전염병, 전쟁이 없는 살기 좋은 땅
여행객들이 살고 싶어하는 마을...지금도 서울 등 외지에서 이주해와

경상북도 예천군이 금천, 내성천, 낙동강이 감싸는 물의 도시, 즉 '수주(水州)'이고, 그 중 용문면은 물이 풍부한 '수덕지향(水德之鄕)'이다. 한국의 힐링처이자 땅의 유토피아, 생명지촌(生命之村)을 찾아 나선 세번째 땅이다. 매봉산(865m) 국사봉(727m)  부용봉(좁게는 망월봉)  백마산이 둘러싼 분지다. 전국이 가뭄으로 난리를 쳐도 물이 부족하지 않는 땅, 그것도 그냥 떠 먹어도 될 1급수이자 물맛이 좋은 땅이다. 이곳에서 나는 쌀맛을 보면 다시 찾지 않을수 없는 이유다. 

예천공설운동장(동본사거리)을 지나 북서쪽으로 약 7km정도 가면 한국 십승지(十勝地)로 손꼽히는 금당실(金塘室)마을이 정좌(正坐)하고 있다(현 주소로는 용문면 상금곡리). 태조 이성계가 이곳을 도읍지로 정하려고 했다는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조선 최고의 예언가이자 풍수지리가인 남사고는 금당실과 맛질에 대해 한양과 유사하나 큰 강이 없어 아쉬워했다고 하니 큰 강이 없어 도읍지가 되지 못했는지 알길이 없다. 조선 시대 최고의 비기(祕記) 정감록에서는 십승지를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라 하여 기근, 전염병, 전쟁이 들어 올 수 없는 좋은 땅이라고 한다. 실제로 현재까지 전염병과 기근 홍수로부터 안전한 땅이다. 남사고는 십승지가 금당실 북쪽이라고 구체적으로 적고 있어 선리, 허리골, 사부리 중 한 곳으로 좁혀 지목하기도 한다. 

 

임환재 화백이 그린 금당실 송림 일부

 

금당실 마을은 2006년 문화체육관광부에 의해 '생활문화체험마을'로 선정됐고 뒤늦게 정부도 보존에 나서 민속마을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금당실은 금당실(상금곡리)과 아랫금당실(하금곡리) 모두를 일컫는다. 상금곡리보다 더 큰 마을은 전국적으로 보기 드물다. 동촌, 서촌, 남촌, 북촌의 4개리로 한 마을 이장이 넷이다. 오미봉(옴봉산, 투구봉)부터 남쪽으로 향하는 혈맥을 따라 북동촌에 조선 시대 가옥들이 많다. 금당실에는 으리으리한 양반가옥들과는 달리 소박한 고택들이고, 나지막한 돌담과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특징이다. 고샅길을 따라 걸으면 돌담이 정겹게 동행한다. 가가호호를 이어주는 총길이가 10리에 가까운 미로같은 돌담길이 옛 사람들의 삶의 체취 그대로다. 근대 이전으로 돌아 온듯하다. 풍광이 아름다운 금당실 마을은 1970년대 영화 '씨받이'를 시작으로 영어완전정복(2003), 나의 결혼원정기(2005), 그해 여름(2006), KBS 드라마 황진이(2006) 등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하금곡리는 금당실 좌청룡에 해당하는 육녀봉(263m) 아래 자리잡았다.

금당실은 마을 주변에 고인돌이 산재했던 것으로 보아 고조선 청동기 시대부터 살았던 아주 오래된 촌락으로 3천년 이상 묵은 마을이다. 조선시대에 함양 박씨와 원주 변씨 예천권씨 등이 대성을 이루며 없는 성(姓)이 없을 정도로 여러 성씨들이 용광로 처럼 번성했다. 보백당 김계행의 맏딸이 안동에서 함창의 함양박씨로 시집을 가서 낳은 아들 다섯이 모두 과거에 급제했는데, 그 중 막내아들 박종린이 16세기 금당실 감천 문씨에 장가들면서 이곳에 터를 잡아 지역 최대 인구다. 독립운동사상 23년이란 최장기 옥중생활을 기록한 박열 의사도 조부 대(1880년대)에 문경으로 이주했으니 이곳이 원 고향으로 소설가 박치대의 <대역>이란 소설의 주인공. 고려시대부터 예천의 토성으로 살아온 권씨 중에 권맹손(權孟孫 1390~1456)은 '도시(都試)'에서 장원 급제해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가 금당실을 지형을 보고 " 산세를 보니 금당실에서 인재가 많이 나 장차 대국에 해를 끼칠 것이니 무쇠말뚝을 박아 산의 맥을 끊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곳이 제갈량 등 인물들의 땅 중국 양양의 금곡 지형과 닮았다는 것

금당실에는 예부터 빼어난 인물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5조판서와 좌·우의정을 모두 역임한 약포(藥圃) 정탁(鄭琢)을 빼 놓을 수 없다. 외가인 하금(개금자) 에서 태어나 자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扈從)하고 조정을 나눠 세자(광해군)와 전시 정국을 이끌었다. 이순신이 어명을 어겨 옥에 갇혔을 때 유명한 상소 '신구차 (伸救箚)'를 올려 이순신을 사면토록 했다. 이순신은 훗날 '나를 추천한 이는 서애요, 나를 구해준 이는 약포'라고 말한바 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용사일기'가 전해온다현대에 와서도 고려대 경제학 교수 출신인 권두영 사민당 당수와 권영자 장관, 세계한인무역협회(World-OKTA)회장을 지낸 말레이시아 기업가 권병하, 트랙스타를 창업한 권동칠 등 인물이 쏟아 나왔다. 

금당실은 대한제국의 한성판윤 법부대신을 지낸 이유인(양주 대감)이 이주하고 강원도에서도 이주민이 몰려오며 십승지로 성가를 높였다. 지금도 여행객들이 찾아와 살고 싶어하며 감탄하는곳이다. 이유인의 저택 터를 비롯해, 임진왜란 통신사 학봉 김성일의 아우 남악 김복일(종택은 구계리)의 증손으로 숙종때 참판과 도승지를 지낸 의성김씨 김빈의 반송재, 사괴당 등 고택이 여러 채 남아 있다. 용문은 3.1운동 등 애국위민운동에 공헌한 인물도 여럿 배출했으며, 오미봉 뒷산에는 반외세 반봉건을 내건 갑오동학농민운동 지도자 전기항의 유택이 있다. 구한국시대 김해에서 이주해온 교동(喬桐)영감이 1900년대 초에 건축했다는 금곡교회는 기독교사에 숨은 보배다. 이대영목사(서울 승동교회)라는 동양 기독교계 거물을 배출하고, 김상진 선생 등이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 거부에 앞장 섰던 교회다. 서울 새문안교회 장로인 청백리 정치인 변우량 전 국회의원과 권덕회 목사 등 교계 지도자를 배출한 곳이다.

금당실 동촌, 남촌, 서촌 삼거리에 용문면사무소가 있고 그 앞에 15세기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500년 노거수(老巨樹)느티나무가 마을의 당나무로 우뚝 서 있다. 원래는 느티나무 4그루와 연못(금당)이 있었는데 일제가 면사무소를 지으며 없애버렸다. 마을 안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내명당수인 실개천은 새마을사업을 하면서 콘크리트로 복개됐다. 마을 이름의 유래가 된 연못과 개천을 다시 개천開川하고 느티나무를 심었으면 좋겠다. 

과학풍수론자로 알려진 안상규 대구가톨릭대 풍수지리학 교수는 금당실에 대해 “서출동류(西出東流) 명당수가 임수(臨水)하고 중후한 큰 배산(背山)의 장풍(藏風)국이다. 개천 넘어는 일자문성(一字文星)의 안산(案山)이 있는 완벽한 풍수지리적 조건을 갖춘 곳”이라고 말했다. 물에 떠있는 연꽃을 닮았다하여 연화부수형이라고 하기도하고 배가 출항하는 행주(行舟)형이라고도 한다. 안 교수는 금당실 앞내 건너 복천(福泉)이라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는 장씨들이 사는 복천마을 뒷동산은 용문의 인물과 부자를 많이 나게하는 성산(聖山)이라고 설명했다. 이 동산에 대해 한국영상예술협회(UNICA) 회장 장찬주 박사는 "해마다 뒷동산 거목에서 단오날 용문 여인들의 그네 뛰기가 큰 축제였다"고 회상했다. 

병암에 자리한 정자
병암에 자리한 정자

금당실 이웃 동네로 안동권씨와 함양박씨들의 집성촌인 맛질마을도 범상하지 않다. 백두대간 묘적봉에서 발원해 내성천과 합류하는 한천을 낀 마을이다. 안동에서 이주해온 야옹 권의(충재 권벌의 형) 선생 후손 중에는 현대에도 권상로 전 동국대총장, 권재진 전 법무장관 등 숱한 인재가 나왔다. 일제강점기까지 '맛질별신굿'이 전해올 정도로 문화 유서가 깊은 마을이다. 맛질의 함양박씨 문집'저상일월(渚上日月)'을 토대로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가 맛질의 농민들을 펴낸 무대다. 박씨 후손중엔 박영각 중소기업중앙회 전무, 대전충남권 시민사회운동의 대부인 박재묵 충남대 사회학 명예교수 등이 있다

백두대간에서 흘러나오는 금곡천과 한천은 주변에 옥답을 만들었다. 경북지방에는 옛부터 '금당 맛질 반서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금당실과 맛질 두 마을이 서울의 반(半)은 된다는 말이다. 전형적으로 산수(山水)가 교합하는 마을이다. 금당실과 맛질사이에 있는 작은 고개(방두들)에는 금당맛질 반서울이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금당실 느티나무 

 

금당실의 또 하나의 볼거리는 천연기념물 제469호 소나무 숲(송림)이다. 일종의 수구막이 비보(秘報)로 조성한 쑤(藪)다. 마을사람들은 이곳을 솔둥지라 불렀다. 금당실 오미봉(옴봉산) 아래 용문중학교부터 용문초등학교 앞까지 약 800m에 걸쳐 수령 100~300년 된 소나무 900여 그루가 울창하다. 원래 아랫금당실(하금곡동) 마을 입구까지 그 길이가 무려 오리(2km)에 달해 장관을 이루었으나, 1890년대 목재로 팔기위해 벌채를 한 이후 훼손되었다.

이 송림을 따라 계곡으로 1km정도 올라가면 국가명승지 초간정이 있고, 그 위에 아름다운 호수 운암지와 여말선초 국사(國師) 두운 선사가 창건한 고찰 용문사가 숨어 있듯이 자리하고 있다. 이 주변 마을에서도 70,80년대 야당(신민당) 거목 신도환씨, 서울대 정치학과에 수석 입학하고 80년 민정당 창당 전문위원 공채에 수석합격한 윤 육 씨가 태어났다. 

금당실 마을에서 서쪽으로 앞내를 건너 약 800여m 가면 죽림리(대수마을)에 예천권씨 초간 종택이 있다. 국사 교과서에 실린 <대동운부군옥>의 저자인 초간 권문해의 생가로 유명하다. 서정주는 <대동운부군옥>에 유일하게 실려 전해오는 석남꽃 설화를 <석남꽃>이라는 시로 지었다. 2000년대 이후 한국 진보정치인의 상징이 된 노회찬이 이 시에 작곡을 한 것이 '소연가'다. 권오상이 지은 별당(보물 제457호)은 안채와 어울려 조선 중기 사대부 집안의 품격이 잘 드러난다. 권오상의 다섯형제가 과거에 급제했으나 권오복이 무오사화 때 능지처참을 당해 네 형제가 몽땅 유배를 가는 멸문지화를 당해 당시 일부 후손들은 안동권씨로 성을 갈기도 했다고 한다. 

금당실 일대를 두 번이나 샅샅이 살펴본 여행작가 정기조(대구 지산동)씨는 "전국을 대부분 다녀봤지만 마을이 온화한 기운을 내뿜고 옥토가 널려 있는 곳은 잘 보지 못했다"며 "과연 십승지 명성대로 명당촌"이라고 말했다. 19세기 까지만 해도 이곳은 전국에서 살기좋은 곳임에 틀림이 없다.

상상해 본다. 국사봉 아름다운 저녁 노을, 상서롭게 떠도는 선동 구름, 버들밭마을 저녁 밥짓는 연기, 오미봉 아래 즐비한 고인돌, 아미산에 걸린 반달을.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넓은 돈두들에 논매는 소리(耘歌), 야당들 논 개구리 소리, 백마산 산새 소리, 은은하게 퍼지는 용문사 새벽 종소리(20세기 이후는 교회 종소리)를. 지천에 널린 전원 풍경을 보고 듣고 즐기며 행복을 찾았던 옛 용문 사람들.

1751년 이중환이 편찬한 『택리지』에는 백성들이 살 만한 곳을 지리(地理),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 등 네 가지 기준으로 골랐다. 금당실은 지리, 생리, 산수는 지금도 유효하다. 하지만 인심은 때때로 바뀌는 법이다. 진정한 승지(勝地)로 지속가능하려면 인심을 꾸준히 갈고 닦고 만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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