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땅의 유토피아, 십승지(十勝地) 예천 금당실(上)
3. 땅의 유토피아, 십승지(十勝地) 예천 금당실(上)
  • 금보리 논설기자
  • 승인 2019.05.01 11:3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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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와 치유를 받는 역병이 없는 생명 안전의 땅 십승지 중 최대 마을
'죽기 전에 꼭가봐야 할 국내여행'에 꼽힌 힐링의 안향(安鄕)
정약용이 유학의 고장으로 예찬한 동양적 가치의 '문화자본'

힐링 여행하기에 딱 좋은 3관왕 마을 금당실

한국에도 외국에 내놓을 만한 한국(통일신라 고려 조선) 다운 역사 문화 정체성을 간직한 동네가 있다. 예천 금당실, 안동 하회, 경주 양동 등등.

또 자연 지형이 우수해 살기 좋고 편안해지는 안향(安鄕)이 있다. 기근 역병 전쟁, 즉 삼재(三災)가 없는 정감록에 나오는 십승지 마을이 대표적. 금당실 풍기 금계리 등등 열군데다. 코로나19라는 역병, 오일쇼크 금융위기 IMF같은 기근, 우크라이나 6.25 같은 전쟁 이 없다면 한마디로 살기 좋은 곳이다.

또 게다가 금당실은 '(半,Half)서울'이란 별칭이 붙을 정도로 농경시대에는 도회지(都會地)급이다. 골목마다 집집마다 온갖 사연을 품고 있고 통일신라말부터 고려 조선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대한민국까지 11세기 동안 왕건 이래 숱한 인물들이 드나들고, 의로운 선비, 압제에 저항한 동학농민, 구국 의병 의열, 독립투사, 신사참배 거부 항일 지사들의 피땀이 서린 곳이다

3관왕 마을 금당실을 가보고 싶으면 아래의 상세 기사를 읽어보면 된다.(2022년1월 전문 증보)

 

3. 땅의 유토피아, 십승지(十勝地)마을 예천 금당실 (상편)

 

한양과 유사한 '금당맛질 반서울' 

우리나라에는 살기 좋은 생명 안전의 복지(福地)로 꼽히는 열곳 '십승지(十勝地)'가 있다. 그 마을 중에서 손꼽히는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속칭 금당실(金塘谷)힐링처이자 땅의 유토피아, 생명지촌(生命之村)으로 와 본 사람들 마다 온화한 기운을 느낀다고 입을 모은다. 십승지는 비기(祕記)적 예언서 <정감록>에서 기근, 역병, 전쟁이 없는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의 땅이다. 에코로지(ecology)시대에 위로와 치유를 받는 어메니티와 문화자원이 있는 머물고 싶은 동네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금당실 전경 부산 출신 화가 백화
금당실 전경(북서쪽 상공에서 동남남쪽으로 본 그림). 부산 출신 화가 백화

 권오복 등 사화(士禍) 입은 곧은 선비의 은거지

 백두대간 소백산 줄기 남쪽에 자리한 용문(龍門)은 북쪽에 우뚝 솟은 소백산맥 매봉(문경 동로면, 효자면 경계 865m)을 먼 뒷산(祖山)으로 해 서산으로 국사봉(727m,유천면 동로면 경계), 동쪽으로 매봉산(예천읍 용문면 감천면 경계), 남산으로 백마산(白馬山,388m용문면 예천읍 경계)이 닭이 알을 품은 것처럼 아늑하게 둘러싼 곳이다. 황하 지류 위수(渭水)가 흐르는 周, 秦, 漢, 唐의 수도인 관중과 지세가 흡사하다.

매봉과 국사봉 사이 통일신라 고찰 용문사가 있는 용문산은 고려 명종이 정중부난 이후 1170년 태자(강종)의 태실을 찾아 전국명산을 다니다가 찾은 이후 고려 조선조 태실이 곳곳에 있다. 용문면은 제곡(渚谷) 휴구곡 유리(流里) 등 북3면(33개동)을 일제의 전국 행정구역 개편 때인 1914년 용문면(18개동)으로 통폐합 된 것. 

'금당 맛질 반(半,Half)서울'이라는 별칭을 가진 금당실은 전국에서 명촌으로 알려졌다. 세종실록지리지에("금당곡 도기소") 나오는 금당실은 이성계가 도읍지로 검토했다는 속설이 있는데,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복지(福地) 열곳은 무학대사와 남사고가 잡았다고 했으니 무학대사가 다녀간 기록은 없으나 관련이 있을 것이다. 조선 최대의 풍수지리가 격암 남사고가 "금당 맛질이 한양과 유사하다"고 한 지리 비평이 구전해 온다.

 금당실은 오봉산(207m 오미봉)과 동지뫼를 배산(背山)으로 삼고 메소포타미아 처럼 앞내(前溪)와 뒷내(後溪) 사이 마을로 앞내들 뒷내들 돈두들(논두들) 방두들 복천들 등 옥토가 펼쳐졌다. 가뭄에도 물이 부족하지 않고 물맛 좋은 1급수인 내성천 지류인 한천의 상류 금곡천을 한수(漢水)라고 개칭하면 좋겠다. 

 

임환재 화백이 그린 국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금당실 송림 일부

 

한때 7백호가 살았던 전국 최대 마을 금당실은 골목길을 경계로 동촌, 서촌, 남촌, 북촌의 4개 리다. 소백산 줄기 끝나는 양지 오봉산(오미봉)은 '묘를 쓰면 큰부자가 된다'고 하지만 태실 이외에는 아무도 쓰지 않는 금기설화가 있다. 십승지 금당실로 이주해 칠곡군수를 역임한 집터에 조부가 1916년에 지은 운치있는 한옥에서 살았던 남병화(86, 안동 송현동)씨는 " '금당실 가서 옷(의관)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꽁보리밥을 먹어도 누구나 의관정제(衣冠整齊)하고 예(禮)스럽게 살았다"고 어릴적을 회상했다

나지막한 담장과 열려있는 대문(短垣開門)으로 들여다보이는 금당실 살림집들은 소박하고 정겹다. 보부상이 외상값을 받아야 할 집을 못찾았다는 10리나 되는 골목길을 별 목표 없이 느긋하게 슬슬 걸으면 '타임머신'을 타고 온듯이 근대 이전의 시간여행을 만끽할 수 있다아쉽게도 정부의 보존 손길이 뒤늦어 많이 훼손됐지만, 70년대 영화 '내시의 아내'를 시작으로 영어완전정복, 나의 결혼원정기, 그해 여름(2006), KBS 드라마 황진이(2006) 등의 영화 드라마 촬영지로 각광받았다.

정약용, "금당실은 공자 고향 노나라 곡부 유풍이 남아 있다"

다산 정약용은 아버지(178081년 예천군수)와 함께 이상정 최흥원과 '영남삼노(三老)' 로 불린 남야 박손경을 예방해 학덕을 칭송한 시(詩)를 남겼고, 밤에 글을 읽는 금당곡을 엄중(현 산동성 곡부) 에 비유하며 유학의 고장임을 예찬했는데('여유당전서'), 엄중이 있는 노나라는 인문정신으로 세계 최초로 개국한 주나라의 정통성을 이은 제후국이다. 또 안정복은 ‘상헌수필(橡軒隨筆)’에서 남야의; 효사상 실천을 기록했다. 세계 유일의 유교 나라가 한국이니 세계에서 유교가 보존된 곳이 안동 예천이다. 정조가 내려준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남야의 사당(용문면 상금곡리457-4)엔 남야의 고조부로 17세기 충청도 태안군수로 부임한 박정시가 억울하게 죽은 처녀귀신의 원한을 풀어주고 얻은 전설의 오동나무 거문고가 있어 문예(文藝) 소재로 충분하다. 

 여러 대에 하늘나라가 임하는 복을 누릴 '안향(安鄕)' 

기라성같은 명사들도 금당실을 찾아 애정을 표했다. 한성에서 살았던 정윤목(1571~1629)이 학가신월(鶴駕新月), 골암소우(鶻巖疎雨), 선동탐춘(仙洞探春), 용문상추(龍門賞秋), 후서운가(後墅耘歌), 전계어적(前溪漁笛), 송현모연(松峴暮烟), 부용제설(芙蓉霽雪)의 금곡팔영(金谷八詠)을 노래한 이후 오경(雅眉半月, 柳田暮煙, 仙洞歸雲, 龍寺曉鍾, 竹林淸風), 팔경(東峀湧月 南山宿霧 西峰落照 北城飛雨 長林牧笛 등)이 나왔다. 눈으로 보는 달 구름 연기, 귀로 듣는 노래 소리, 특히 성기게 적게 조용히 내리는 비소리 춘하추동 등을 즐긴것...

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길지 금당은 여러 대에 걸쳐 하늘이 내린 복을 편안하게 누릴만한 곳 누대 안향(安鄕)"이라했고, 17세기 洪汝河(복천 丁달도 스승)는 만년에 "산천유람을 다니다가 '풍수장원의 형세가 아주 좋은 금당과 복천사이에 좋은 집터를 찾아내 살았다"목재문집>에 적었다고종 때 친청 수구파의 거두 민영휘(민영준 개명,명성황후의 15촌 조카)가 금당실 南明학교(후일 3.1운동 때 체포되고 옥중 순국한 풍산 가일의 권오설이 다녔다고 알려짐) 초대 교장을 맡았다.

금당실은 고인돌 90여기, 마제 석기, 칠성바위가 있어(현재는 대부분 밀반출되고 없음) 고조선 청동기 시대 이전 최소 3~4천년 이상 사람이 살았던 아주 오래된 마을이다. 칠성바위 공원과 청동기 시대 움막집이라도 재현할 법하다.

이곳이 특이한 것은 하나의 집성촌이 아니라 감천문씨, 횡성조씨(월천 조목의 고조부) 등 다양한 성씨가 용광로처럼 대동(大同)사회를 이뤘다.

안동권씨는 개령(고령) 현감 권지(權輊)가 금당실에 입향 이후 세거했다. 권지의 5세손 권적(權迪1626-1679)은 영암군수 시절 제1의 목민관으로 왕의 상을 받았고, 충주 목사를 지낸 후 선정비가 지금도 충추시에 있다. 조선 4대 도시인 충주 목사를 지낸후 1677년 금당실(북촌) 작은 집터에 세칸겹집 와가 1채, 두칸 초가 1채를 지었다(權忠州家). 청백리 가옥이자 예천 최고(古)급의 목조와가 살림집인데, 2020년 전후 무너졌다. 평양 서윤, 남원 부사를 제수받고도 노모 봉양을 이유로 응하지 않았다. 사간 정언 재직 시 세칭 '영남삼사간(嶺南三司諫)'중에도 으뜸이었다. 사헌부 집의(종3품)시절 한성에서 별세하자 왕명으로 고향으로 돌아가 장사를 치루게 한성에서 예천까지 호상(護喪)토록했다. 남긴 '구곡문집'은 목민심서의 원형으로 볼 수도 있다.

이후 용문의 안동권씨들은 국제기업인 스텐포드호텔 H마트 권중갑 회장, 권석필 성남시 중원구청장 등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용문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함양박씨는 함창 출신 이조 정랑 박종린(보백당 김계행의 다섯 외손자 모두 대과에 급제하고 벼슬했는데, 외손 중 하나)이 금당실 감천 문씨 집안에 장가를 가면서 번창했다. 후손 11명이 문과 급제했다. '東國通志''조선책략'을 배척하는 '수양만설(謾說)' 등을 저술한 19세기 대학자 박周鍾, 1661년 선교사 알레니(Aleni)의 지도를 필사해 국내 최고(最古) 세계지도 '만국전도'(보물)를 그린 박정설, 영남삼로로 유명한 남야 박손경, 대창고등학교 교사 박치대의 소설 <대역>의 주인공으로 독립운동사상 최장기간(23년) 투옥된 박열 의사, 박장식 동일기계 대표 등이 후손들. 박열은 조부 대(1880년대초)에 문경으로 이주.

1010년 개심사 5층석탑(보물)에 새겨진 임장부 세습 호장 이후 고려무신난 때 아버지가 숙청되자 귀향한 국순전 저자 임춘 등(고려사열전)의 예천임씨(용문면 직리 등)와 함께 예천에 세거한 예천권씨는 명봉사비에 기록돼 있을만큼 유구한 역사를 지닌다. 서예가 초정 권창륜, 권중호 경북대 농대학장 등이 후손이다충목왕 이름과 같은 흔()씨를 외가 성씨인 권씨로 바꿨다도시(都試)에 장원 급제, 세종 문종조에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권맹손(1390~1456)의 딸이 소산 안동김씨 김계권과 혼인해 그 아들이 대문호이자 세조의 국사(國師) 학조대사, 김영전감찰, 김영균진사,김영추부사, 김영수장령이다. (한양 장동에 세거한 장령공의 4세손 김상용(金尙容)은 재야 사림의 구심으로 떠올랐으나 병자호란시 강화도가 함락되자 순절했는데, 김옥균 김가진 김좌진이 그의 후손이다. 척화파 거두 김상헌(金尙憲)은 병자호란 직후 풍산에 낙향해 있을때 청이 명나라 정벌을 위한 파병을 요구하자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심양으로 압송됐다.  뒷날 영의정 이경여는 김상헌에 대해 "나라 위한 經은 하늘을 떠 받드는 큰 절개"라고 시를 지은 바 있다. '이상(二尙)의 후손 중 세칭 '삼수육창'이란 인물이 쏟아졌다. 김수항 김수홍 등  '3수(三壽), 김창집 김창협 김창흡 김창업 김창즙 김창립 6창(六昌)'이다. 6창의 후손 중 정조의 고명대신 김조순(金祖淳)과 그 아랫대인 '근'자 항렬에 이어 김병기 김병학 김병시(총리대신)등 '병'자 대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한성 판관을 지낸 김계권의 딸(김간아)이 다시 구계리 전주유씨 류용(일명 柳유)과 혼인했으니 소산과 금당실의 인연이 깊다. 연산군조에 실각했는데, 후손이 독립운동가이자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이다.

또 17세기 사초 성격을 지닌 당후일기를 저술하고 참판과 도승지를 지낸 의성김씨 김빈 집안의 반송재(옛 남참봉댁, 교동영감댁)변응녕 후손이 사는 사괴당 등이 있어 조선 시대 사대부가를 엿볼수 있다. 남악 김복일의 후손 4명이 문과 급제자. 남악 김복이원주변씨는 류용(柳유)의 사위가 된 귀계 변희리(문과 출신으로 형조 좌랑)가 예천 입향조. 변우량 전 국회의원, 변정구 전 중소기업중앙회 수석부회장, 변찬우 전 광주지검 검사장, 변제우 주손(전 매일신문 편집국장), 변병식 기업인, 변찬 영남대 기계공학 교수등이 후예다.

금당실은 정감록의 영향으로 조선 후기부터 이상향으로 인기를 모았다. 김해 서출로 마름(경남향토사논총에 기록돼 있지만 후손은 동의하지 않음)의 신분을 뛰어넘어 마흔 두살에 6품 벼슬을 하고 법부대신 등 구한국 조정을 주무른 이유인, 교동방어사 이유직, 강원도 고을 수령(정선)을 하고 금당실 남촌 기와집에 살았던 씨, 이퇴계의 제자 琴씨 등등. 

한양성 위성 도시인 양주(현 의정부 동두천 남양주 구리시, 고양시와 서울노원도봉중랑광진구)목사, 함경도 관찰사, 한성판윤, 시종원경(고종 비서실장), 병조참판도 지낸 이유인은 대한제국 탄생과 고등재판소(대법원)설립에 관여했고, 법부대신(1898.3~98.6)때 탄핵 상소와 독립협회의 항의로 물러나고 공진회(이준)에 의해 탐관(貪官)으로 구금 유형 사건으로 황해도 철도에 잠시 유배됐다가 금당실로 돌아온 직후 경상북도 관찰사로 복귀했다. 경북 관찰사(1901.2~1902.1)시절 수령 행차가 요란했다. 당시 쌓은 담장은 건축술(김창기 건축)이 뛰어나 지금도 남아 있는데, 반듯하고 우람하다1904년 일제의 황무지 개간을 저지하는 애국계몽단체 '보안회' 부회장에 잠시 추대(황성신문)돼 을사늑약을 반대했고, 고종의 밀명으로 영남 의병을 선동했다(1906년 9월 대한매일신보, <고종황제와 한말의병> 2007 선인 간 오영섭 저). 친일파 권력에 의해 1907년 생을 마감했으며(한성신문 사망 기사) 자신의 첩 얘기가 잡지<개벽>의 '명첩열전'에 오르내릴만큼 풍운아였다. 집안 손자뻘인 이규학 육군 중장은 통일부차관을 지냈다.

일제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한 금곡교회 등 근대의 여명

예천은 1894년 8,9월 금곡 유계소에 동학농민군 자치기관인 포덕소(권順文접주, 관군에 의해 불질러짐)가 설치돼, 금당실 폐정개혁 몸부림인 동학농민혁명이 거셌다. '창의척왜'로 반외세 반봉건을 내건 동학혁명군은 압송을 요구한 박참봉 이선달 윤계선 읍내 대지주 중 이유태 전 안동영장을 끌고와(구전에는 금당실 느티나무 저잣거리에서 멍석말이) 재물을 빼앗고 수탈을 일삼던 아전(황준대 김병운)을 징벌하자 관군은 농민군 11명을 붙잡아 한천에 생매장 보복했다(갑오척사록). 금당실 집강소(역사문제연구 32(2014))가 설치되고 1946년 10월사건 때도 다시 지주들이 곤욕을 치뤘다. 경상도 서북부 동학혁명농민군(최맹순 수접주)의 자금원이었던 천석꾼 전도야지(전기항 의사, 한겨레신문, 민족문제연구소 논문집)을 필두로 금당실엔 의병전쟁, 3.1운동, 황국신민을 강요한 신사참배 거부 등 조선말 구한국 저항 정신을 이어갔다. 3.1운동때는 상금곡동민 100명이 면소앞에서 밤 10시에 대한독립만세 시위를 해 일부는 검거됐다('폭도사편집자료 고등경찰요사'). 

금곡교회와 해방종
신축된 예천 금곡교회와 해방종이 보관된 스텐 종탑

 

김해부사, 교동방어사를 지낸 이유직(증손자 이광덕) 등이 1900년대 초 예배를 시작해 출발한 금곡교회는 한강이남 최초의 자생 교회로 기독교사에 숨은 보배다. 이유직 김창기 상산댁 변공집 이대영(후일 중국 선교사 서울 승동교회 대한얘수교장로회 총회장) 등이 초기 교인이고, 권덕회 박우식 신현진 박래흠 목사 등 많은 목회자가 나왔다. 경상북도 학무국장 출신인 이규원 초대 대구대(현 영남대) 학장의 아들이 MIT 공학박사 출신으로 미국 대학 교수와 글로벌기업 GE 중역을 지낸 이종진 성광중고등학교 이사장이다.

일제 강점기에 내선일체 황국신민화를 위해 한민족에게 강요한 신사참배를 앞장서 거부해 투옥된 김상진(金相鎭) 선생은 "참배를 한다하면 석방하고 그렇지 않으면 사형한다"는 왜검의 협박에도 최후의 1인으로 굴복하지 않고 저항해 고난을 겪었다. 안동 소산이 고향인 그의 정신과 문화 독립을 위한 그 투지는 이사야(Isaiah)가 외친 자유와 해방의 가치였다. 강탈당한 교회 종(광복종)8.15 해방 이후 자택(금당실길52-16, 52-20 소소당)으로 되찾아 놓았다가 금곡교회 재건후 다시 종각에 세워 보존한 종지기다. 런던 켄터베리교회 종탑 아래서 숨진(런던시 공휴일) 종치기 니콜라이 집사처럼, 아동문학가 권정생 일직교회 종지기처럼 평생 종을 쳤다경북도는 이 해방종을 근대문화유산으로 관리할 만 하다

매봉산 국사봉 백마산 북성이 한눈에 보이는 것이 백미인 소소당(김상진 생가)앞 고택은 안동권씨 권영호 국사편찬위원회 해제위원의 생가(현재 박씨 소유)다. 안동 원촌의 진성이씨 부인과의 슬하에 경기중학교와 보성전문에 다닌 맏아들 권재탁씨가 대구 동산병원에서 투병할 때 쓴 '백의천사송'이 현재 서울대 간호학과 강당에 대형액자로 결려있는데, 딸이 권인각 성균관대 의대 교수다. 자손들이 한의사(서울대 국문과를 나온 문필가), 치과의사, 변호사, 종교인으로 활약 중이다. 일본 최고의 등산화 브랜드 트랙스타를 창업한 권동칠 대표도 한 때 이 집에서 살았다. 

사진은 1969년 권재탁씨가 대구 동산병원 투병중 쓴 한시 '백의천사송'과 국역시를 차녀 인각이(왼쪽 첫번째)서울대 간호대 동창회보에 올린것을 서울대에서 간호대학 강당벽에 게시한 것
1969년 작 '백의천사송'과 국역시가 액자에 담겨져 서울대 간호대학 강당벽에 걸려 있다. 권인각(왼쪽) 성균관대 의대교수.  

 

금당실 용문면소 부근은 원래 마을에서 내려온 명당수가 모인 연못(금당)이 있었다. 금당실 정남향인 동촌(상금1리) 1번지 남쪽 광장에 일제가 면사무소를 지었다.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콘크리트로 덮은 골목길 도랑과 연못을 다시 복원한다면 중세를 간직한 스페인 톨레도 같은 명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랫 금당실(하금곡리)은 5조 판서와 좌·우의정을 역임한 약포(藥圃) 정탁(鄭琢)을 낳고 키운 곳이다이곳 외가(평산 한씨)에서 태어나 11세까지 자랐고 안동 가구촌(현 와룡 지내리)으로 아버지 고향으로 가 유학 후 20대초에 금당실 처가살이를 재차 하러 왔던 아버지가 별세하자 다시 금당실로 와서 삼년상을 지냈다. 임진왜란 시 좌찬성(1)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扈從)하고 세자 광해군과 분조(전시 조정)를 이끌어 '임진기록' '용사일기' 등을 남겼다. 이순신이 투옥되고 선조가 이순신의 죄를 논하라고 명하자 정탁은 유독 간언하기를 "죽여서는 안되며 뒷날 공을 이루도록 간청해 관직만 삭탈했다(징비록). 구명 상소인 '신구차(伸救箚)'도 유명하다. 이순신은 훗날 "나를 추천한 이는 서애요, 나를 구해준 이는 약포"라고 했다(난중일기). 유성룡 노수신(영의정)과 함께 학문 경륜이 최고봉인 경상도 출신의 3대가로 꼽혔다.

아랫 금당실 예천 권씨는 성균관에서 이율곡을 포용한 초간 권문해의 조부 3형제가 급제했다. 홍문관 교리 권오복은 무오사화 때 처형 당하고, 두 형제(권오행 공조 좌랑, 권오기 예문관 검열)도 유배를 갔다. 아랫 금당실이 쑥대밭이 됐다.

하금곡리엔 현대에 와서도 고려대 경제학 교수 출신 권두영 전 사회민주당 당수와 권영자 전 장관, 세계한인무역협회(World-OKTA)회장을 지낸 말레이시아의 기업가 권병하 등 인물이 나왔다.

배가 출항하는 '행주(行舟)형'의 금당실에 동학 때 농민 집강소  

안상규 대구가톨릭대 풍수지리학 교수는 금당실에 대해 명당수가 임수(臨水)하고 중후한 배산(背山)의 장풍국(藏風局)으로 일자문성(一字文星)의 조건을 갖춘 배가 출항하는 행주(行舟)형이고, 금당실의 안산(案山)격인 복천(福泉)의 동산은 잠두(蠶頭)로 부자를 나게 하는 성산(聖山)"이라고 했다. 한국영상예술협회(UNICA) 회장 장찬주 박사는 "해마다 동산 거목에서 단오날 용문 여인들의 그네 뛰기가 큰 축제였다"고 회상하고, "전 세계 많은 나라들을 여행하는 동안 아름다운 마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금당실의 소박한 아름다움은 세계 어떤 곳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소박한 풍경과 고즈넉한 평온함이 깊이 배인 곳"이라고 했다.
또 하나의 볼거리는 천연기념물 송림이다. 비보(秘報)로 조성한 쑤(藪,군락지)로 솔둥지(송림)라 불렀다. 오미봉에서 남북 약 800여m에 걸쳐 수령 130~300여년 된 소나무 900여 그루가 울창하다. 원래 병암 정자까지 5(2km)에 달해 장관을 이루었으나, 금광 채굴을 막으려는 1892년 민란('예천禁鑛사건')이 일어나 배상금 재원 마련을 위해 벌채를 했다고 한국 향토사학의 선구자격인 정양수 전 대창중고 교장이 전했다.   

앞내 뒷내 천내 등 삼수(三水)가 만나는 병암에 자리한 정자(이유인대감이 1900년 완공시 옥수정) 

솔개가 나는 아늑하고 포근한 금당실에서 하룻밤을 묵으면 십경(十景)을 보고 듣는다. 금당실은 해 뜨는 곳(아나톨리아)곳과 해 지는 것을 아름답게 볼수 있는 지세다. 이른 아침 금당실 동쪽으로 보는 매봉산(341m ) 위로 슬며시 뜨는 해돋이는 서기와 영성이 샘솟는 듯 하다. 짜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가 왜 동틀 무렵 오리엔트의 질서를 가져온 유일신을 만났는지 알 법도 하다. 죽림에서 해뜰 무렵 솔둥지 넘어 아미산도 장관이다.

산진수회(山盡水廻)의 땅 용두산 병암정자에서 본 문경 공덕산 천주봉의 낙조(落照)와 방두들에서 본 국사봉(國師) 석양의 해넘이를 보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진리를 탐구하는 관조(觀照)와 초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남산(백마산)과 학가산의 달도 보는 이 마다 현묘(玄妙)를 느낀다.

해가 진 금당실의 야밤. 적막강산과 칠흑같이 검은 하늘에서 새어 나오는 초롱 별. 부끄러운 앳된 처녀의 얼굴같이 살포시 외로이 떠오른 저 멀리 학가산에 뜬 초승달. 들릴듯 말듯한 밤 새 소리. 서울 광화문 거리의 낮이 헨델의 할렐루야(메시아 中)라면, 금당실의 밤은 바흐의 천상음악 같다. 들판에서 여름 농부들이 논매는 노동요 소리(歌), 개굴 개굴 들판의 개구리 합창, 초야의 백마산 뻐꾹새 소리, 은은하게 퍼지는 금곡 예배당 종소리(金堂효종)는 평안함과 뇌의 심연을 보듬는다.

비발디의 사계(Four seasons)' 평온한 느낌의 땅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의 소리를 묘사한 바로크 음악의 거장 베네치아 비발디의 '사계(Four seasons)'가 탁월한 걸작이지만 직접 사계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자연, 생명체 소리, 동네를 거닐면 폐에 생기를 불어 넣는 상큼한 바람(淸風), 볕(日光)이 뿜어내는 안향 금당실의 힐링은 신의 축복이 아닐까.

이중환의 택리지에 살 만한 곳을 지리(地理),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로 꼽았다. 지리, 생리, 산수는 지금도 유효하다. 하지만 문화와 인심은 때때로 바뀌는 법. 진정한 길지, 복지, 승지로 지속가능하려면 인심이 넉넉하고 부드럽도록 수신(修身)해야 할 것이다. 김연식 전 태백시장은 선정(善政)의 단체장으로 알려진 김휘동 안동시장이 '한국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을 내걸어 전국에 '수도'브랜드 열풍을 선도한 사례처럼 지역도 하기에 따라서 희망의 개척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경북대학교 계약교수인 김정모 법학 박사는"유럽의 종교개혁과 과학・시민・산업혁명은 아랍에 남아 있던 십자군전쟁이후 그리스 로마 역사를 찾아내 복원한 르네상스에서 시작했다""용문에 남아있는 유불선과 프로테스탄티즘 윤리 등 산업화 이전 문화 속에 시대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가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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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다르크 2022-05-02 13:49:55
새록새롯 지난해추억 소환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