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 의사에 관한 소설 <대역>을 쓴 박치대 소설가
박열 의사에 관한 소설 <대역>을 쓴 박치대 소설가
  • 한경희
  • 승인 2019.05.01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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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대 소설가는 생전에 하루도 글 쓰지 않은 날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지속적인 창작활동을 해왔다. 어떤 모임자리에서도 말씀이 크게 없었는데 많은 말을 소설로 담아냈다고 볼 수 있다. 작가가 되는 길은 참 많지만 박치대 선생은 어디에도 응모하지 않고 혼자서 글을 쓰고 출판까지 한 독립작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한국작가회의(민족문학작가회의) 소속 회원이지만 근본적으로 문학잡지든 신문이든 현상공모든 시도한 적이 없다. 대체로 문학청년기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등단을 시도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박치대 선생은 <大逆>(대역)이란 소설을 통해 소설가로서의 이름을 전국의 많은 작가들에게 알린 셈이다. 누군가 이름을 붙여 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이름을 만드는 일을 선택했던 것이다.

언젠가 옛터라는 카페에서 선생을 모시고 지역에서 소설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선생이 “소설은 (당신의) 생활의 일부이다.”라고 말하셨던 기억이 난다. 하루라도 글을 안 쓰면 (정신적인) 몸살이 날 정도라고 하셨다. 글을 향한 집념이 대단했던 분이었음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글 쓰는 일을 특별히 누군가에게 배운 적도 없고 아예 처음부터 장편소설을 그냥 썼다고 했으니 문학에 대한 열정이라고 설명하고도 뭔가 부족한 점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글 쓰는 일을 즐겨 했던 분위기가 중요할 것 같다. 집안가계를 보면 함양박씨 집안의 독립운동가인 박열 의사에 대해 할배, 아부지로부터 엄청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가 소설 쓰기의 중요한 바탕이라고 했다.

그런 집안배경은 소설세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박치대 소설은 지역사람들의 삶을 주제로 설정한다. 작가가 살고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현실의 농촌문제와 교육문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탐구하는 정신이 돋보인다. 우리 문단의 베스트셀러는 국가의 역사와 국민의 삶을 묻는 일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보니 지역민의 애환에 관심을 두고 그것을 쓰는 작가를 만나는 일은 흔하지 않다. 더구나 우리말에 대한 애착과 강한 자부심은 그대로 작품에도 나타난다. 표준말로 고친 흔적이 없이 지역사람들이 평소에 쓰는 말투 그대로 작품화했다. 어릴 때 서당에 다니면서 한문공부를 하는 유교적인 환경에서 자라났고, 우리 것에 대한 가치를 강하게 지켜간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우리문화에 대한 주체의식이 매우 강한 작가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직업은 영어교사였다.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관념 속에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이뤄낸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특별히 영어교사가 된 사연을 보면 영어가 아니라 영문학에 심취한 청소년 시절이 있었다. 대창고등학교 3학년 때 영어선생님이 대단히 인상적인 분이셨는데 셰익스피어 작품을 극화해서 공연도 하셨고, 그때 셰익스피어, 톨스토이, 헤밍웨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영어로 명작들을 읽어보고 싶어서 일기를 영어로 쓰면서 영어공부를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된 모양이다.

박치대 선생은 1965년에 경희대 문리대에 입학을 했다. 그때는 한일협정비준에 반대하는 데모가 들끓었고 대학수업은 전혀 진행되지 않아서 휴교령까지 내려졌던 시절이다. 정치적으로 불안했던 시절에 서울생활은 전혀 익숙해지지 않았고 공부까지 할 수 없어지자 선생은 아예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다.

고향에서 선생은 재건학교운동과 개간사업을 했다. 정규 중학교를 못간 사람들을 모아서 용문재건중학교에서 공부를 가르쳤는데 한 300여명이 들었고 그때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규모였다고 한다. 1960년대 말부터 군대 갈 때까지 계속 그 일을 하였다. 책은 한 권 안에 국어, 영어, 수학, 사회 등 기본적인 과목이 묶여져 있었고 두께는 한 200면 정도라고 한다. 개간사업은 집 뒷산에 뽕나무를 심고 잠실을 짓는 일이었다. 그때 정부에서 내건 슬로건이 “한 치 땅도 놀리지 말자.”라고 하여 개간을 장려하였다. 면사무소의 담 둘레에도 그냥 두지 않고 뭔가를 심었다고 한다. 그런데 유신이후 독가촌은 공비들이 숨어들기 쉽다고 면사무소 직원들이 강제로 잠실을 헐어버렸다. 그때 참 많이 실망하였다고 한다.

다니던 대학을 그만 두고 시골로 돌아온 그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할 일을 찾아서 이웃에게 보탬이 되는 삶을 살았다. 물론 정부가 주도한 사업이기는 하나 개인의 희생이 필요한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더불어 사는 삶의 소중함을 젊은 시절부터 실천한 분이었고 그 연장선에 교사라는 직업이 놓인다. 또 함께 살아야 한다는 믿음은 지역민의 삶을 문학의 중심축으로 놓게 된 것이다. 한 작가의 삶을 보면 작가가 추구한 작품의 세계도 연결되어 읽히게 된다.

소설가 박치대를 상징하는 작품인 <대역>을 줄거리 중심으로 읽어본다. 이 작품은 아나키스트로 우리에게 알려진 박열 의사의 일대기를 그린 역사소설이다. 작가는 최대한 역사적, 전기적인 사실에 충실한 글쓰기를 보여주고 있다. 박열이 예천 금당실 마을에서 자라난 유교적 문화를 재구성해서 보여주었고, 서울 경성고보 3학년 재학 시절 만세운동으로 체포되었던 것 등은 사실에 충실한 이야기들이다. 박열의 정신적인 강인함을 강조하려는 듯, 15세의 나이인 청년 준식이 어려운 집안형편에도 불구하고 경성에 유학갈 계획을 가진 것으로 그려내기도 했다. 또 형이 보증을 잘못서서 땅을 다 빼앗긴 것이 일본의 의도적인 계획이며 언젠가 모조리 국토가 빼앗길 것이라는 추측도 할 줄 아는 어른스러운 면도 갖춘 인물이다.

박열은 노동자 조직을 꾸리고, 아나키스트 오스끼 사까에를 만나려고 했으나, 이 사람이 경시청에 잡혀가고 만다. 박열은 더욱 강한 뜻과 활동력을 가진 학생 노동자들을 모아 의거단(義擧團)으로 조직 개편을 한다. 이때부터 박열은 총과 폭탄을 구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실행에 옮겼지만 실패하고 만다. 지진의 사회불안을 조선인 탓으로 몰아부치는 분위기 속에서 흑우회 사람들은 물론 박열의 아내까지 잡혀간다. 일본 경찰은 거기서 김중한과 그의 애인의 입을 통해 박열이 폭탄을 구하려고 했던 사실을 포착하고 박열은 감옥에 갇힌다.

박열은 1945년 10월 27일 아끼다 형무소에서 석방되었는데 22년간 감옥살이에서 살아남은 박열은 고향땅을 밟아 아내의 무덤을 돌보고 일본으로 돌아와 신조선건설동맹 위원장으로 뽑혀 민주주의 조국 건설, 사해동포와 세계협동, 민족자주, 근로 대중의 보호 등의 강령을 채택하고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단체가 확대되어 재일조선인거류민단으로 바뀌었으며 단장이 되기도 하였다.

박열의 석방 1주년에는 국제신문 아르바이트 기자 장의숙이 찾아와 취재도 하였고, 1947년 장의숙과 결혼한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축하하는 마당에 박열은 이승만의 초청을 받고 조선에 건너왔다. 이승만은 대통령이 될 때까지 박열을 이용하고 그 이후는 거리를 두었으며 채 2년이 못되어 한국전쟁으로 박열은 북한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1974년 1월 18일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박열의 죽음이 알려진다. 북에서 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장을 지냈으며, 북한에서는 박열을 평양에 있는 애국열사능에 안치하고 있다.

박열 의사는 아나키스트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우리의 독립을 위해 천황을 죽이고자 시도한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하고, 전쟁 이후 월북을 선택해 비교적 남쪽에서 자세하게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이런 인물을 두고 작가는 단순히 집안이야기에 묶이지 않았다. 개인에게 필요한 정신의 자유와 올바른 역사의 수레는 같은 바퀴로 굴러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늘과 땅은 수레바퀴처럼 돌고 도는데 (乾坤車輪轉)

본래는 높고 낮음의 구분이 없도다 (本來無尊卑)

세계는 전부가 하나 둥근 공인 것을 (世界渾圓球)

어느 곳에 하찮은 변방이 있으리오 (何處有邊鄙)

위의 시는 박열 의사가 실제로 쓴 작품이다. 일제식민지의 폭력성을 개인적인 울분의 문제가 아니라 제국주의의 구조적 문제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여기 나타나는 말을 통해 박열 의사의 동학사상을 알 수 있다. 세계를 하나의 둥근 공에 비유해서 억압과 차별과 변방의 이분적인 의식을 극복해야 한다고 쓰고 있다. 우주철학의 흐름을 이해하고 그 질서에 맞춘 인간의 삶이 생명의 원래 모습에 적합한 것이라고 썼다.

지역에서 소설을 창작하는 일이 수월찮은 것은 지면부족과 절대적인 창작시간의 문제일 것이다. 전업작가로서 소설을 창작한다는 일은 어느 지역에서든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작가 박치대의 경우, 동인 한내글모임을 통해서 지면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 큰 의의가 있는 일이었다. 우리 문단이 제도적으로 만들어 둔 등단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소설집을 당당하게 발표하면서 전문작가의 길을 스스로 열어낸 것은 남다른 작가의식까지 연결되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작품의 대상은 모두 시골에서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의 삶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작가가 살아가는 생활공간이 농촌이니 자연스럽게 적용되었던 것이다. 시골에서 평생 농사가 천직인 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존문제를 소설이 풀어간다. 이 사람들이 처한 생존의 문제는 결국 산업화, 근대화 과정의 문제로 연결되고 있는데 이 내용이 구체적인 사건을 통해 드러난다. 인물설정에서 작가의식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소설 속의 주인물들은 이런 체험을 통해 구조적 모순을 이해하게 되고 현실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또한 교사라는 직업의식은 교육문제를 그의 소설의 중심 주제 중의 하나로 만들어 참교육 문제를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역문학이 가야 할 바람직한 길은 박치대 소설가의 삶과 작품에서 찾아낼 수 있다. 실제 지역문학 현장에서 소설 쓰는 작가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소설은 절대시간이 요구되는 장르이다. 사건의 기술을 집요하게 이끌어내는 긴 호흡은 소설을 쓸 수 있는 시간을 얼마나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다. 엉덩이로 소설 쓴다는 말이 다른 것이 아니다. 경제적인 문제로 지역에서 소설을 출판하는 출판사는 거의 전무하다. 이런 사정으로 지역에서 소설가를 찾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러나 박치대는 이런 힘든 여건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문제를 소설로 다루고 지역에서 소설을 출판한 작가이다.

선생은 모든 것이 제대로 되자면 지방에서부터 욕심 없이 예술활동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개인의 사사로운 욕심 때문에 일을 하면 그르친다는 말을 남겨두었다. ‘욕심 없이’라는 말에 방점을 달아보자. 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두 종류이다. 아예 마음을 비워 욕심이 없는 사람이거나, 욕심이 도를 넘어 자신의 욕심 이외 욕심은 모두 무시하는 사람이다. 선생의 평생 삶을 보면 소설 열심히 쓰려는 진짜 욕심 하나, 이외는 없던 분이다. 그러니 길을 찾기 어려운 지역의 문학을 두고 마음이 몹시 불편하셨을 것이다.

아직 박치대 소설가의 죽음은 추억의 영역에 있지 못해서 마음을 추슬러 글을 쓰는 일이 어렵다. 그래서 아예 포기했다. 어떤 죽음과 만나더라도 익숙하지 못하고 늘 낯설 것은 자명하고 그 뒤까지 살아남아야 한다면 또 남아있기 때문에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그저 그런 일을 겨우 해야만 하는 마음이 이 길을 나서게 했다. 올 봄엔 마음이 몹시 시리다. 죽음이 겹쳐져 있는 탓이다. 안동, 예천의 작가들 마음이 이와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란 것도 잘 안다. 삼가 박치대 소설가의 명복을 빕니다. 

(글/한경희_안동대 국문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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