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이야기: 안동부사 김가진
경상도 이야기: 안동부사 김가진
  • 대구경제
  • 승인 2019.08.26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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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국 개화파 관료 김가진(金嘉鎭, 1846 ~ 1922)은 부자(父子)가 안동부사를 지내며 안동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김가진 김의한 정정화 김자동

 

나중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고문이 된 김가진은 독립운동 참여 인사 중 대한제국 벼슬아치들 중 최고위직인 종1품 출신. 호는 동농(東農)이고 안동김씨다. 문충공 선원 김상용의 11대손으로 안동부사출신으로 예조판서를 지낸 김응균의 아들이다.

외교통상 분야에 두각을 나타내며 농상공부대신 황해도 충청남도 관찰사 등 근대사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일본어, 중국어, 영어에 두루 능통했다.

갑오경장때 군국기무처회의원(軍國機務處會議員)으로 내정개혁에 참여했고, 신문물도입 및 제도 개혁에 앞장서면서 독립협회 창설등 애국계몽운동에도 참여하였다.

대한협회회장으로 한일합방을 주장하는 일진회와 대립했다. 일제강점후 조선귀족령에 의해 남작작위가 주어졌으나 두문불출하다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항일 비밀결사 ‘조선민족대동단’을 결성, 총재로 추대되었다. 대한제국의 대신으로는 유일하게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했다. 동농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을 상하이로 망명시키려다 실패한 '대동단 사건'을 일으켰다. 김가진의 망명은 상해임시정부에는 큰 힘이 되었고 일제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임정에 오자 김 구 선생등 모두가 큰 절로 예를 표하고 김가진을 맞이했다.

김가진이 안동부사 시절의 일화 한토막이다.

조선 말 세도정치인 안동김씨(장동파) 명문가 출신 김응균에 이어 부자가 안동부사로 부임했다. 김가진은 김응균의 서출이어서 양반동네에 사또로 오다니... 안동 양반들 눈에는 꼴사나운 일이라 뒤로 수군댔다.

의성김씨 내앞 종손이 더욱 심했다. 버릇을 고치려고 김 부사는 내앞 종손을 관아로 호출했단다. 아무래도 부사의 소환 호출이니 안 갈 수는 없다. 내앞 종손은 도포자락을 휘날리면서 관아에 들어선 종손은 부사 앞에 떡 버티고 서서 부른 이유를 따졌단다.

그러자 부사는 이방을 불러서 수수대를 가져 오라고 명했단다. 그리고는 종손에게 수수대를 도포 속에 넣으라고 명했단다. 그러나 2~3미터도 넘는 수수대궁이 소매 속에 다 들어 갈 리가 있겠는가.

부사 왈 "1년 자란 수숫대궁도 못 집어 넣을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무슨 양반이라고....."하면서 감옥에 집어 넣어 버렸단다. 죄목은 1년 자란 수숫대도 못 감추는 도포로 위세를 떨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의성김문과 여타 문중에서 난리가 났단다. 초록은 동색이라던가. 지방관의 공덕비 하나 안 세워 주는 돛대 같은 안동양반을 하옥하다니. 그러나 문종. 유림. 관이 여차저차하여 풀려나고 좋게 끝이 났단다.

당시 유명한 양반동네 안동에 회자됐다. 그 사건을 두고 동농 김가진은 걸물은 걸물이다-란 소문이 안동지방에 쫙 퍼졌단다. 이 이야기는 학문이 상당한 지경에 이른 의성김씨 모 후손에게서 나온 것이다.

남선면 신석리 인골에는 피부병에 좋다는 기늘 약수탕이 있으며 부근에 안동부사 김가진의 친필 동대(東臺)가 암각되어 있으며 봉정사에 현판을 남겼다

김응균의 아들은 서자로 영진 가진이 있고, 적자가 없어 집안 조카 항렬에서 데려와 양자(화진)로 정식 대를 이었다. 김가진의 효성에 관한 얘기다.

아버님, 일어나세요. 소자는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가진은 손가락을 깨물고 피를 내어, 아버지의 입에 흘려 넣어 드렸다. 풀리던 동공(瞳孔)이 일순 모이며 가진에게 가닿는가 싶더니, 아버지는 눈을 감았다. 1875년 동농 나이 서른 살의 일이었다.

상청(喪廳)의 주인은 양자 화진이다. 부친의 장례를 치르고, 삼우(三虞)까지 지내고 나자, 가진은 탈진했다. 사흘 밤낮을 잤다. 꿈을 꾸었다. 아버지다. 가진이 어릴 적, 늦둥이 둘째에게 글을 가르쳐 주시던 그 모습이셨다.

“가진아, 늦었다고 조급하게 여기지 말아라!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말이 있지 않으냐? 좀 더 기다려 보아라. 모든 것은 수(數)가 있느니라.”

(김위현, <동농 김가진전>, p113)

“재주만 믿고 게을리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글씨 연습이 중요하다. 우리 일족은 모두가 명필 소리를 들어왔다. 너도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으니 하루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내가 한가한 지방관으로 나와 있으니 너에게는 더 없는 좋은 기회가 아니겠느냐?”

(김위현, <동농 김가진전>, p36)

김위현 명지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동농 김가진전>(학민사, 2009)과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김가진 평전>(미출간)에 나오는 얘기다.

조선 후기 4대 명필로 ‘독립문’의 한자·한글 제자와 창덕궁 현판 글씨 등 명필가 김가진은 수만은 현판 글씨를 썼다. 다음은 독립신문 기사다.

황해도 관찰사 김가진 씨가 해주 먹판을 금번에 새로 만들어 먹에 박아서 전국에 반포하였는데. 그 먹 전면에는 제국 독립문(帝國獨立門)이라 박아 도금 하였고 후면에는 독립문을 온통 모본하여 박고 국기와 독립문에는 또한 도금을 하였더라. 물건에 까지 이렇게 판각하였으니 김씨의 마음에 독립이자 사랑하는 것을 깊이 치사하노라. 전국 인민이 일심으로 애국하여 독립이자 생각하기를 이 먹에다 각(刻)한 것과 같이 함을 우리는 바라노라.

- 1898년 1월 25일자 독립신문 잡보

동농은 임시정부의 고문과 백야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고문을 지내다 1922년 7월 상해에서 순국했다.

그의 장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장(葬)으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유해는 상하이 만국공묘(현 송경령 능원)에 안장됐지만 1960년대 중국 문화혁명기에 파괴돼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동농의 유해가 하루발리 고국으로 돌아오길 고대한다.

동논의 증손녀 김선현씨는 "동농의 망명은 일제 통치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였고 임시정부 고문으로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독립에 대한 열망을 불태운 점을 인정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장'의 예우로 장례를 치른 것"이라며 "정부는 아흔을 넘긴 아버지의 평생 소원인 유해 국내 봉환이 하루빨리 이뤄지길 소망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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