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서상철(徐相轍)과 갑오년(1894) 안동의병
2. 서상철(徐相轍)과 갑오년(1894) 안동의병
  • 대구경제
  • 승인 2019.08.26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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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철 갑오변란에 맞서 의병을 결심하다.

한국 근대시기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선 항일투쟁은 1894년부터 1945년까지 약 51년간 전개되었다. 그 본격적인 시작이 1895년 을미의병이다. 그런데 한 해 앞서 안동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바로 갑오(甲午) 안동의병이다. 이 의병은 갑오변란(甲午變亂)이 그 발단이었다. 갑오변란은 1894년 6월 21일(양 7. 23)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입하여 국권을 무너뜨리고 왕실을 핍박한 사건이다. 이는 청나라와 전쟁을 시작하기 전 열강의 시선으로부터 자신들의 무력행사를 숨기기 위해 벌인 일이다. 갑오의병은 여기에 저항하여 일어난 것이다.

이를 이끌어낸 인물이 서상철(徐相轍, 1859~1932, 이명 徐相睦)이다. 활동에 비해 그의 개인적인 인물사에 대해서는 정보가 많지 않다. 그와 6촌이 되는 서상렬의 문집인 경암집(敬菴集)과 류중교의 장담강록(長潭講錄), 그리고 대구서씨세보에서 단편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이들 자료를 종합하면 서상철은 1859년 서울에서 태어나, 제천의 청풍으로 옮겨와 살았다. 본관은 달성, 자는 자유(子由), 호는 경은(敬殷)이다. 그는 조선중기 문인인 약봉(藥峯) 서성(徐渻)의 9대손인 호순(浩淳)의 장자로 태어나, 큰집인 국보(國輔)의 장자로 입양되었다. 1895년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서상렬과 6촌간이다. 서상철은 제천 청풍으로 옮겨와 거주하면서, 화서학파의 잇고 있는 유중교 문하에서 수학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사실은 유중교가 제천의 장담에서 강학할 때의 일을 기록한 장담강록에 잘 드러난다.

의병을 일으킬 장소로 안동을 선택하다.

서상철은 갑오변란이 일어나자 이에 저항하여 안동에서 기병하였다. 그가 기병 장소로 안동을 선택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지만 몇 가지 추정은 가능하다. 우선 그의 먼 조상이 안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달성서씨가 안동 일직면 망호리에 입향한 것은 함재(涵齋) 서해(徐嶰, 1537~1559) 때이다. 망호리 마을 입구에 위치한 소호헌(蘇湖軒)이 바로 그가 거처하던 집이다.

소호헌은 본래 안동 법흥동 임청각의 이명이 다섯째 아들 이고를 분가시킬 때 지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서해가 이고의 외동딸과 혼인하면서 그 집을 물려받게 되었다. 서해의 아들 서성이 과거에 급제하여 판중추부사에까지 이르고,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됨으로써 달성서씨의 위상도 크게 올라갔다. 그 후손들은 대를 이어 일직면 소호리에 세거하였는데, 서해는 바로 서상철의 12대조이다. 이러한 인연은 서상철이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킨 중요한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 사진 1 소호헌

또 하나는 바로 안동이 가지는 학문적・정신적 기풍이 중요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안동은 주자학에 바탕을 둔 위정척사의 성향이 매우 강한 지역으로 대의명분이 강했던 곳이다. 즉 안동지역 유림이라면 임금이 일본군에게 굴욕당하는 모습을 그대로 두고 보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는 이러한 안동에서 거의가 이루어진다면, 전국의 유생들도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이유로 서상철은 안동을 첫 의병 장소로 선택한 것이다.

7월 서상철 포고문을 내고, 군사를 모으다.

서상철은 1894년 7월 2일 한인석(韓麟錫)․이성재(李罄載)․한수동(韓守東) 등과 더불어 「호서충의서상철포고문(湖西忠義徐相轍布告文)」을 보내는 것으로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격문은 경상도・충청도를 중심으로 널리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보낸 포고문의 요지는 7월 25일에 안동부의 향교 명륜당에 모여 적도를 토벌할 기일을 약속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의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꼽았다. 임진왜란과 병자년에 강제로 체결된 조약, 그리고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핍박한 갑오변란이 바로 그것이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갑오변란은 서상철이 갑오의병을 일으킨 핵심 원인이었다.

## 사진 2 포고문

포고문을 배포한 그는 안동 일대의 주요 지도급 인사들을 방문하고 동참을 호소한 것으로 보인다. 안동의 향산 이만도(李晩燾)는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만도는 7월 14일 서상철의 포고문을 받았으며, 7월 20일 예안향교에서 서상철을 만났다. 이때의 느낌을 이만도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서상철 본읍(예안) 향교에 오다. 언사가 바르고 의로움이 굳건했다. 그러나 군사 모으라는 왕명이 없이 선비 스스로 기의(起義)하였으니, 조정에 죄를 얻을까 두렵다.

(이만도, 향산일기, 1894년 7월 20일자)

이만도는 서상철의 의로움을 인정하면서도, 왕의 공식 명령 없이 군사를 모으는 일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어 7월 25일 안동향교에서 예정대로 첫 거의의 횃불을 올렸다. 그러나 이 거사는 안동부와 대구감영의 저지로 뜻대로 되지 않았다. 대구에서 200여 명의 관군이 파견되었고, 모인 사람들은 강제로 해산되었다. 이만도는“안동의 모임은 감영에 의해 정지되었다고 한다.”고 이날의 일을 짤막하게 기록하였다.

## 사진 3 안동향교 옛 모습

그 뒤 서상철은 계속 군사를 모집하여 결국 음력 8월초 안동일대에서 2,000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의진을 결성하였다. 당시 경기도 일대에서 청일전쟁이 진행되는 상황이라, 일본군에 대한 공격 차원에서 의병진용이 구성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그 구성원과 이를 이끌어낸 안동의 유림들이 누구였는지는 현재로서는 알기 어렵다.

9월(음력 8월) 태봉을 공격하다.

서상철이 이끄는 안동의병은 일본군의 병참부대가 있는 상주 함창의 태봉을 공격목표로 하였다. 태봉은 대구와 충주를 잇는 주요 병참선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대구에서 낙동을 거쳐 태봉에 이르고, 다시 문경 새재를 넘어 수안보를 거치면 바로 충주로, 또 남한강을 따라 서울로 이어지는 병참선상의 주요거점이었다.

## 사진 5 상주 태봉

안동의병은 태봉 진격 직전인 8월 24일 안동 근처에서 정찰활동을 벌이던 다케우찌[竹內] 대위를 체포하여 처단하였다. 이어 9월 1일에 의병 600여 명이 태봉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일본군 제6사단 토오고오[藤後] 소위가 인솔하는 공병대 25명의 반격을 끝내 막아내지 못했다. 이날의 전투에서 2명이 전사하였으며, 부상자도 다수 발생하였다. 또한 화승총 103정, 칼 4자루, 창 4자루 등 무기도 빼앗겼다. 결국 안동의진은 후퇴했고, 서상철은 청풍방면으로 물어나 전투를 치른 것으로 보인다. 일본군 정보 문건에 따르면 그 뒤 서울로 잠입한 것으로 탐지되었으나,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1894년 안동의병은 안동유생이 아닌 다른 지역 출신에 의해 발의되었지만, 안동지역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거사이다. 안동의병은 유교적인 충의정신에 바탕을 둔 반외세 성향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또한 이후 1945년까지 반세기 동안 전개된 국권수호운동과 독립운동의 서막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장 강윤정)

* 이 글은 김상기, 한말의병연구(일조각, 1997); 김상기, 한말 전기의병(독립기념관, 2009); 김희곤, 안동 사람들의 항일투쟁(지식산업사, 2007)을 참고하였으며, 사진・자료는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에서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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