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과 70,80년대 최고의 정치학자 이극찬
에리히 프롬과 70,80년대 최고의 정치학자 이극찬
  • 신광조 전 광주광역시 국장, 행정고시합격
  • 승인 2020.03.02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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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아픈 사랑도 사랑이다. 새로운 미래에 맞게 삶의 방식과 목표를 전환 할 것!”

우리나라에 강의를 잘 하는 교수 분들이 많겠지만, 나는 최고로 돌아가신 이 극찬 교수님을 꼽는다.

김 동길 교수님도 신비한 부분이 있었다. 그 분은 옛 역사적인 사실은 사진기 찍듯이 말씀하셨다.
英詩와 漢詩를 자신이 지은 듯 말씀하셨다. 나이가 90이 넘으셨는데, 암기력이 지금도 샘물 솟듯 한다.

김 형석 교수님은 칸트처럼 정확하셨다. 글은 두 분 못지않았지만, 입담은 두 분만은 못했다. 사모님께서 아파서 누워계셨는데, 소나기에 나오는 소년처럼 수줍은 사랑을 하셨다. 두 분은 정말 나라걱정을 오직 애국심하나로 많이 하신다.

신광조
신광조

 

나는 의아스러운게 문재인대통령께서 연세대를 졸업하지는 않았더라도, 생전에 계시는 김형석 교수나 김동길 교수의 말씀에 콧방귀도 뀌지 않는지 모르겠다. 사람은 머리가 좋다고 많이 배웠다고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큰 인간의 차이는 그가 소유로서의 삶을 사느냐, 존재로서의 삶을 사느냐이다. 소유로서의 삶을 살면 절대로 대통령이 싫어하는 말을 할 수가 없다.  당장 모가지가 잘려, 마누라를 울리게 할 배짱 좋은 남자가 대한민국에 몇이나 있겠는가. 이런 삶의 철학에 얽힌 문제를 고민하며 나찌 체제의 모순을 직접 겪은 프롬은 1978년 ‘소유냐, 존재냐’의 책을 썼다.
이 극찬 교수님은 프롬의 이야기를 영화보다 몇 배는 재미있게 실감나게 강의를 해 주셨다.
몇 몇 학생들은 교수님의 강의가 너무나 웃겨 의자에서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늦게 들어와 교실 뒷자리에 앉은 학생들은 책상에 앉아있지를 못하고 교실 뒤 빈 공간을 뛰면서 돌아다니며 감동을 달랬다.
최근 이 남희 교주와 김 남희 여인에 얽힌 신천지의 슬픈 코미디와 “대가리가 깨져도 문재인 ‘대깨문(특히 광주의 김미숙, 엘 등)’”들의 광란현상에 대한 심리분석을 하면서, 이 극찬 선생님의 名 著‘ 정치학 개론’을 한 번 꺼내어 읽어보았다.
교수님은 에리히 프롬을 인용했다. “개인적 자아를 전멸시킴으로써 고독감을 극복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매저키즘적 현상이다. 또한 그것은 자기 밖에 있는 보다 더 크고 강력한 전체의 일부분으로 되어 그 속에 몰입됨으로써 그것과 관계를 맺으려 하는 것이다. 조금도 동요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며 영구적이며 매혹적인 것으로 느껴지는 힘의 일부분으로 화합함으로써 사람은 그 힘과 영광에 동참하고자 한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굴복시켜 그가 가지는 힘이나 자부심을 내어버림으로써 개인으로서의 통일성을 상실하며 자유를 버리게도 된다. 그러나 그는 몰입되고 있는 힘에 참가함으로써 새로운 안전감과 자부심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교수님으로부터 프롬의 The Fear of Freedom 원서와교수님의 번역서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받고, 번역이 애매모호한 점을 말씀드려 교수님께 극찬을 받았다. 훗날 교수님께 미국 대학원 유학 추천서를 써 달래고 교수님실에 들렀더니, 그 이야길 꺼내자마자 “Genius! Extraodinary Genius! Excellent Genius!”라는 비과학적 인 단어를 굵은 파카 만년필로 대문 짝 만하게 써주셨다. 어찌됐든 나는 아무도 모르게 파란만장한 대학생활을 보냈다. 혼자일 때가 많았고, 윤 동주 시비 앞에서 밤늦게 까지 별을 헤는 밤이 많았다.

누구보다 용감했으나 무명용사의 무덤이라는 노래를 좋아했다. 러시아민요 스텐카라친을 비 내리는 날, 비를 맞고 힘차게 부르고 있으면 예쁜 여학생들이 머리가 좀 돌았다고 생각했는지 머얼리 자리를 피했다. 
백양로에 꽃잎은 흩날렸고, 비는 내렸다. 늘 봄은 잔인했다. 모자르트의 음악이 깨진 유리알 파편처럼 나의 가슴에 박혔다. 슬픔과 아름다움은 구별도 경계도 없었다.
대중가요 작사를 써 가면 편 당 2만원을 받았다. 아무도 모르게 아르바이트를 하고 아무도 모르게 데모시위를 한 맺힌 놈처럼 하고, 나는 여리고 힘없는 자들을 위해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하나로, 떠나버릴까 몇 번이나 마음먹었던 행정고시 시험장을 끝가지 지켜, 행정고등고시라는 취직 시험에 합격을 했다.
이렇게 가는 길도 학생운동이나 노동 현장 참여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합격하리라고는 생각도 않고 신춘문예 준비를 하던 중, 합격통지를 받았다. 난생 처음 부모에게 하는 효도였다.

절에나 가서 면벽이나 하려는 사이에 친구 범도에게 연락이 욌다. “뭣 하냐?"당 시 출판사 일을 하며 민주화운동을 숨어서 하던 범도는 같이 뛰어 줄 동지가 필요했다. 술값도 밥값도 다 나에게 내게 해놓고는 범도는 어려운 일을 쉽게도 명령했다.
“무안에서 자기를 초벌구이 했는데, 그 자기에다 그림과 글씨를 받으러 다니자”
“누구에게?" “사람들이 좋아하는 분들, 문익환 고은 백기완 백락청 김지하 박경리 김규동 이기형 등등, 우리를 도와주실 좋은 분들이 많이 있어. ”
둘은 사흘이면 한 번씩 고장이 나는 봉고차를 빌렸다. 가마니에서 막 구워 낸 자기를 가득 실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께서 광주에서 온 청년들의 뜻을 잘 이해해주고 격려해주시며 온 정성을 다해 글 을 써주셨다. 문익환 목사님께서 수유리 집에서 하루 밤 묵고 가라는 말을 뒤로 하고 범도는 애인과의 약속이 있다고 운전을 하는 분에게 차를 남쪽으로 모라고 하였다.
밖은 어두워졌다. 점심도 못 먹고 배는 등에 붙었다. 범도는 애인이 보고 싶은지 휴게소에도 안 들르고 글씨를 받은 자기는 깨지든 말든‘전 속력으로, 풀 스피드, 풀 스피드’ 를 주문했다. 서해안 도로 쪽 군산을 넘어오다가 드디어 문제가 생겼다. 속도위반으로 의경에게 걸렸다. 경례를 붙인 의경은 원래 속도위반 단속 임무도 있지만, 불심검문의 임무도 부여되어 있었다. 특히 차를 이용해 하는 범죄를 차단할 의무가 있었다.

 2인 1조 의경 중 한 명이 봉고차에 올라왔다. 참말로 요상하네, 도자기 장사도 아니고. 조국의 민주통일이 뭣이고, ‘올라 갈 때 안 보이던 것이, 내려갈 때 보인다’가 뭣 이다요. 그 친구의 상상력이 비상했다. “요새 군산에 교사들이 반정부 운동을 한다는 데 그 분들하고 관련은 없지요?” “그 사람들 우리도 잘 알아. 그 사람들 애국자다 애국자.
의인들이여! ” 
범도가 안해도 좋을 말을 해버렸다. 얼른 내가 말을 바꾸었다. "우리는 광주에서 와  부렀당께, 그 대는 전경 몇 기 이신가 ?, 우리는 군산에서 아구탕이랑 꽃 게장 식당하는 친구 말하는 것이여. "“살펴서 내려 가시시오, 충성!” 
광주에 도착했다. “도자기 잘 간수하고 있다가 인자부터는 살 사람들을 찾으러 나서야 한다. ” “ 야 범도야, 나 첫 월급도 한 번 못 타 보고 공무원 종 칠 뻔 했다. 조사 받았다가는 끝 날 뻔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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