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통일평화로: 한일해저터널' 6
‘신통일평화로: 한일해저터널' 6
  • 박성열
  • 승인 2020.05.14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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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이 하나가 되어 한일해저터널건설에 앞장서야!

9)한국, 일본, 미국 세 국가의 긴밀한 관계 유지와 세계평화구현을 위한 역할을 담당

 

해저터널 당사자 국가인 한국과 일본은 물론 미국도 해저터널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이고 동참해야 할 것이다. 미국의 영향력은 한국과 일본을 비롯하여 아시아 지역에서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그 위력을 해저터널공사 실현에도 발휘해야 할 것이다.

문선명,한학자총재는 세계선교를 출발하는 시점에서 일본과 미국을 해외선교를 위한 토대국가로 선택하였다. 에덴동산을 중심하고 전개된 복귀섭리사 중심으로 보면 한국은 아담국가, 일본은 해와국가의 입장에서 부부처럼 친밀하게 지내는 사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미국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해와의 성장을 돕는 역할을 했던 천사장과 같은 입장에서 한국과 일본을 돕고 나아가서 자유민주주의가 세계적으로 실현되게 하는 위상을 유지해야 한다. 이 세 국가의 밀접한 관계 유지와 세계평화를 위한 중심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양위분은  세계선교의 본격적인 출발을 위하여 1965128일 세계 40개 국가에 120개소 성지를 결정하기 위해 제1차 세계 순회 노정에 오를 때에 가장 먼저 일본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8개 지역에 성지를 결정한 후에 곧장 212일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213일 샌프란시스코 성지 선택을 시작으로 331일까지 미국 전역을 순회하면서 중요한 50군데에 성지를 택정하였다. 식구들은 그 곳에서 특별히 정성을 드리게 되었다. 세계 순회를 마치고 귀국하기 전에 다시 929일에 일본을 들렀다가 10일간 전국 지방 순회를 하였다.

이어서 문선명, 한학자총재는  본격적인 세계선교 출발을 위하여 19711218일 미국 워싱턴에 도착하여 케네디센터 오페라하우스에서 리틀엔젤스예술단 공연 관람을 하였다. 미국에 아름다움과 노래와 춤을 선사(善事)하면서 미국을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는 중심국가로서 사명을 다할 것을 축복하여 주었다.

한국과 일본과 미국은 세계평화 구현의 중심이 되고 축()이 되어야 한다. 이 세 나라는 단기간에 세계 유래가 없을 정도의 경제적 부흥을 이루었다. 그 배경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다. 재림메시아,참부모로 강림한 문선명.한학자총재와 함께 하나님을 중심한 하나의 세계’(One World under God)를 실현하는데 선구적인 사명을 다하도록 하나님이 세 국가들에게 큰 복을 주신 것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기독교가 이단으로 몰아붙이면서 온갖 음모와 박해를 가하였고, 일본은 문총재의 입국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고 통일교회와 가정연합을 불건전한 종교단체로 규정하는 실수를 범하였다. 미국은 건국 당시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호소하면서 미국인을 각성시키기 위한 각종 대회와 집회를 쉴 사이없이 진행하고, 워싱턴타임즈를 통하여 좌경화되는 미국을 각성시키기 위하여 노력한 문총재를 댄버리 교도소에 수감시키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종교단체는 세금 면제를 받게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프레이저 의원이 상원의원으로 진출하기 위한 실적을 만들기 위하여 통일교회를 한국 정부의 앞잡이라고 헐뜯었고, 정부는 세금 탈세를 혐의로 조사를 강행하였다. 통일교회로서 미국에 진출하던 초창기에 선교자금을 은행으로 입금한 것에 대해 이자에 대한 세금을 내지 않았다는 것이 죄목이었다.

통일교회는 197661일 미국 건국 200주년 기념하는 뉴욕 양키스타디움대회를 개최하였다. 5만여명이 운집하여 새 진리와 함께 미국이 건국 정신으로 부활할 것을 다짐하였다. 918일에는 워싱턴 모뉴먼트대회가 있었고, 30만명이 모여서 미국이 하나님의 뜻 앞에 앞장서는 국가가 될 것을 촉진하였다. 이처럼 미국 건국 200주년 기념행사 일환 뉴욕과 워싱턴에서 큰 대회를 치르고,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자 이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조직적으로 일어났다.

미국 하원 국제관계소위원회(위원장 로널드 프레이저 의원) 청문회가 있었다. 1978322일부터 4차례에 걸쳐 박보희 선교사를 증언대에 세운 이 청문회는 한국 정부가 미국 의원들에게 거액의 로비자금을 제공했다는 의혹, 이른바 코리아게이트와 연결시켜 통일교회 활동을 저지하겠다는 정치적 야심 때문에 일어났다. 이러한 일련의 공세 속에 문선명총재는 19811015일 탈세 혐의로 뉴욕 연방지방법원에 기소되었고 수차례 법정에 출두하였다. 그때마다 성명서를 통해 미국을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아직도 인종차별과 종교 편견이 남아 있다고 반박하였다. 그리고 미국과 세계 인류를 위한 희생봉사의 삶을 살았기에 한 치의 부끄럼이 없고 떳떳하다는 것을 천명하였다.

뉴욕 연방지방법원은 1982년 문선명총재에 대한 탈세 혐의의 재판을 위한 사전 단계로 12명의 배심원단을 구성하였다. 당초 통일교회 변호인은 재판의 공정성을 이유로 배심원에 의한 판정대신 판사의 재판을 요구했으나 뉴욕 지방법원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미국 정부의 의도대로 1982518일 유죄 평결이 내려졌다. 뉴욕 지방법원은 716일 배심원들의 유죄 평결을 토대로 세계에서 식구(신도)들이 송금한 헌금 160만 달러의 이자 112천 달러에 대한 소득세와 5만 달러에 상당하는 주식의 배당금에 대한 세금으로 1973년부터 1975년까지 3년간 7300달러(그 당시 기준으로 한화 약 500만원, 2019년 환산 기준으로 약 950만원)의 납부의무가 있는데도 이를 탈세했다면서 이에 대해 징역 18개월과 벌금 25천 달러를 선고하였다. 변호인단은 113일 연방고등법원에 항소했으며, 미국 종교계와 민간단체들이 무죄 청원서를 잇달아 제출하였다.

미국을 살리기 위하여 천문학적인 돈을 쓰는 문선명총재와 통일교회가 한국 돈으로 약 900만원 정도의 세금을 내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내 건 것은 종교적 탄압의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추측하기에 충분한 것이 아니겠는가? 종교단체는 세금면제를 받게 되어 있는 미국에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부당한 편견에서 온 결과가 아니겠는가? 그 돈으로 부동산을 사거나 나쁘게 활용한 것도 없었다. 세계의 식구들이 미국 선교를 위하여 송금한 양심적이고 깨끗한 돈이었다. 감옥에서도 미국을 비롯하여 세계를 공산주의 마수로부터 구해내고 당신이 찾은 새 진리로써 인류가 깨달음을 얻고 축복받은 가정이 되기를 촉구하였다. 댄버리 교도소에서 있으면서 미국을 경제적으로 부흥시키기 위하여 회사를 6개나 설립하였다.

미국 법원으로부터 이 같은 판결이 내려지자 미국에서는 참아버님의 재판에 항의하는 각 기독교 지도자들에 의한 종교 자유의 대회가 개최되었고, 많은 양심적인 인사들이 종교 탄압이라며 항의시위를 벌였다. 변호인단이 항소했지만 1983913일 연방고등법원에서 원심이 확정되고 1984512일 대법원에서 상고를 기각하면서 형은 그대로 확정되었다. 이로써 19811015일 기소 이후 1984720일 입감되기까지 29개월간의 재판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미국의 종교인들이 종교박해라고 규탄하고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문총재의 무죄를 외쳤으나 결국 1984720일 밤 11시에 코네티컷주 댄버리 연방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수감되기 전에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억울하여 눈물을 흘리는 미국 식구(신도)들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미국을 위하여 울어라고 하면서 미국을 각성시킬 것을 지시하였다. 이는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에 울고 있는 여인들에게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 후손을 위하여 울어라고 한 것과 같은 장면이었다.

투옥 중에 그의 무죄와 의로운 언행과 평화를 위한 업적이 돋보여서 수감 중에 문선명 총재는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아르헨티나 라플라타 가톨릭대학교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유엔본부에서 받았다(1984.11.15.).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미국 캐롤라이나주 롤리 소재 쇼우(Shaw)신학대학(침례교계통)으로부터 받았다(1985.5.11.). 그리고 명예신학박사를 미국 성경신학대학원으로부터 받았다(5.28).

그는 감옥생활을 하면서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다. 그는 모범수로 인정을 받아서 5개월 감형을 받았고, ‘옥중의 구세주’(Messiah in the Prison)라는 호칭을 받았고, 미국과 중남미가 공산화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CAUSA운동을 지시하였고, 세계평화교수협의회 카플란 의장에게 소련 공산체제 멸망을 예언하게 하였다. 19858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2차 세계평화교수협의회 국제회의에서 카플란 의장이 소련 제국의 멸망을 예언한 공산주의 종언을 선포하게 하였다. 그 당시 소련은 세계를 잠식하는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고, 세력 확장에 방해가 되는 것은 처치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소련의 멸망을 외치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었고, 예언자의 소신과 자신감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199049~13일에 모스크바 세계무역센터에서 제11차 세계언론인회의가 있었다. 65개국 600여명이 참석하였다. 또한 9일에는 제3차 세계평화를 위한 정상회의와 제9차 중남미통합기구 회의가 같은 장소에서 있었고, 전직 대통령 및 수상 40여명이 참석하였다. 11일에는 참부모님 성혼 30주년 기념행사를 모스크바 국제호텔에서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치렀다. 이어서 문선명총재 부부와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부부와의 회담이 모스크바 크렘린궁 집무실에서 있었다. 이 자리에서 문선명.한학자총재는 다시 한번 공산주의를 해체하고 종교의 자유를 주는 나라가 되게 하라고 요청하였다. 고르바초프는 이 제안을 수용하였다.

이 여세를 몰아서 1991126일에는 함경남도 흥남시 마전 김일성 주석 공관에서 문선명,한학자총재는 북한 김일성과 단독 회담을 가졌다. 문선명.한학자총재는 김주석에게 북한이 핵무기 생산을 하지 않을 것을 세계에 선포하고 경제를 살려서 북한 주민들에게 실질적인 풍요를 안겨줄 것을 제안하였고, 김주석은 수용하였다. 금강산 개발 프로젝트에 공동 서명도 하였다.

이처럼 세계공산국가의 대표격 나라인 소련과 북한이 변화하였다. 그리하여 19858월의 공산주의 종언 선포 이후 불과 6년이 지나서 19911225, 세계가 크리스마스 축제를 기념하는 시간에 소련의 대통령이자 지도자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소련 지도부를 해체했으며 소련의 핵무기 발사 시스템을 포함한 전권을 러시아의 대통령 보리스 옐친에게 승계했다. 이날 저녁 732, 모스크바 크렘린에 마지막으로 소련의 국기가 내려가고 혁명 이전에 사용된 러시아의 국기가 계양되었다. 소련의 와해 배경에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으나 문선명.한학자총재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댄버리 교도소에 있으면서 중남미의 적화 방지를 위해 워싱턴타임스를 통해 니카라과 지원활동을 펼치는 등 옥중에서도 세계평화를 위해 쉼 없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셨다. 그는 댄버리 교도소에 수감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평소에 잠을 2-3시간 밖에 취하지 않는 문선명총재에게 하나님이 잠을 8시간 잘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고 해석하면서 그는 결코 하나님과 미국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물론 문선명 총재는 다른 재소자들처럼 잠을 푹 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다가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였어도 하나님께 일체 불평이나 원망을 하지 않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평소의 신앙생활의 자세가 여기서도 발휘되었다. 10시부터 그 다음날 아침 6시까지는 문밖으로 나올 수 없기에 그는 침대에서 기상하여 조용히 묵상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 일과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간단한 체조를 하면서 건강을 지켰다.

교도소 수감사건을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내면서 자원하여 식당 설거지와 청소를 하였다. 그 모습을 보고 모두가 감동을 받았다. 재소자들은 통일교회 교주라고 비난하는 태도에서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탈세 혐의가 잘못된 것을 그들도 인지하게 되었다. 모범수가 되어 5개월 감형을 받았고, 마침내 1985820일 입감 13개월 만에 출감을 하였다.

만약 문선명 총재가 선진국의 국민 혹은 백인으로 탄생하였다면 결코 댄버리수감 사건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사건은 2천년 전의 예수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에 비유된다. 현대는 자유민주주의가 실현되어서 그나마 수감 사건으로 종결되었지만,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없었다면 문총재는 더 큰 고난을 당하게 되었을 것이었다. 문총재는 북한 공산주의 체제하에서는 죽음에 이르도록 고난을 당하였고, 무지와 불신에 붙잡힌 기독교인들과 일본 미국 및 다른 나라 지도자들에 의하여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였다. 그러나 문총재는 저들을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래 후손들로부터 어리석은 조상들이었다고 비판을 받게 될 것을 염려하였다. 그는 역사 이래 의인들이 당하였던 고통과 고난보다도 더 극심한 곤경에 처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였으나 변명하지 않았고 침묵하였다.

제10차 국제과학통일회의(ICUS) 1981년 11월10일 서울

 

박성열 박사

UPF(천주평화연합) 부산광역시 지부장,세계평화도로재단 자문위원,한일터널연구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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