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예송논쟁(禮訟論爭)
현대판 예송논쟁(禮訟論爭)
  • 사회평론가 함동식
  • 승인 2020.07.13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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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민당은 백장군의 죽음에 논평 한줄 없고, 미통당은 박시장 문상 거부... 유불리 계산 도리에 침묵

며칠전 하루를 사이에 두고 현대사의 두 거목이 운명을 달리하였다. 한 분은 6.25 전쟁영웅으로 추앙받는 백선엽 장군이고 또 한 분은 인권변호사,시민운동가로 존경받던 박원순 서울시장이다. 두 사람의 인생 궤적이야 서로 다른 행로를 걸어왔지만 추앙과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거인의 발자취 만은 부인할수 없다. 그래서일까 아직 장례도 끝나지않은 상중이건만 온 나라가 시끄러울 정도로 논란거리가 되었으니 과연 거인의 죽음답다는 생각이 든다. 백선엽 장군이야 우리 나이로 101세의 천수를 누렸지만 박원순 시장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으니 서울시민은 물론 국민 모두가 느꼈을 충격은 가히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대저 죽음의 의식이란 동서양을 막론하고 경건하고 엄숙하다. 특히 유교적 규범이 지배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우리의 전통상례는 다른 의례에 비하여 더 복잡하고 까다로우며 때론 상대를 공격하는 정쟁의 도구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물론 예전의 복잡하고 엄숙했던 규범은 사라지고 간소화 되었지만 지금 고인의 영전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바라보면 참 무례하고 한심하다는 생각이든다.

국민의 여론은 둘로 나뉘어지고 진영논리에 매몰되어 상대편의 죽음에 조문과 애도는 뒷전이고 조롱과 비난을 퍼부어대기 바쁜 모습이다.

백장군은 과거 친일 행적을 문제삼아 대전 현충원 안장을 거부해야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박시장은 서울특별시장(葬)에 반대하는 국민 청원까지 등장하였다. 급기야 서울특별시장을 금지 해달라는 가처분 신청서를 법원에 제출하였다고 하니 과거 조선조 현종,숙종 연간에 벌어졌던 예송논쟁을 다시 보는 듯 하다. 일부 유튜버들은 돈벌이에 급급하여 타인의 죽음을 희화화하고 조롱한다. 또한 극성스러운 몇몇 사람은 고인의 빈소 앞에서 고성과 행패를 부리는 패륜적 작태를 아무꺼리낌 없이 자행한다.

우리사회가 예의도 없는 불상(不祥)스러운 세상이 되었구나 하는 한숨이 나온다. 예전의 우리네 조상들은 타인의 죽음에 부치는 만사(輓詞)를 쓸 때 온갖 찬사와 칭송만을 늘어놓은 글로 채웠다. 그것이 고인에 대한 도리요 예의라고 생각했다. 지금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마찬가지이다. 민주당은 백장군의 죽음에 논평 한줄 없고 통합당은 박시장 빈소에 문상을 거부하고 있다. 각자 유불리 만을 계산하고 인간의 도리에는 침묵하고 있다.

1910년,경술국치를 당하여 비분강개한 나머지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고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 바친 단주 유림(旦洲 柳林)선생의 일화가 생각난다. 단주는 경북 안동의 전주 류씨 가문에서 태어나 안동 선비의 표상으로 살다 가신 분이다. 그래서 단주 이후에 안동에는 진정한 선비가 배출되지 않았다고 말들 한다. 그런데 단주 선생에게는 불행한 가족사가 있다. 단주는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는데 처 자식과 인연을 끊고 홀로 살다 생을 마감하였다. 단주의 젊은 날은 만주와 중국을 떠돌던 독립투사 시절이었으니 가족을 볼 일이 없었을테고 해방 이후 귀국해서도 가족들을 만나지 않았다. 아들 유원식이 만주국 장교가 되어 일본군에 복무를 했다는 이유였다. 딸 역시 친일 경찰간부와 결혼 했다는 이유로 인연을 끊었고 자기가 없는 동안 자식교육을 잘못 시켰다고 부인 마저도 만나주지 않았다. 그렇게 고집스럽던 단주도 딱 한번 가족을 대면한 적이 있었다. 며느리상을 당하였을 때였다. 단주가 며느리의 죽음을 슬퍼하자 누군가 물었다 “왜 슬피 우느냐”고. 단주가 대답 하기를 “죽음 앞에서는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 법이네, 모두가 똑같네”라고 했다고 한다. 단주의 아들 유원식은 5.16 군사 쿠데타의 주역으로 5.16 직후 박정희를 수행하여 윤보선 대통령을 만나 쿠데타를 추인 받은 인물이다.

인간은 누구나 평가의 대상물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일수록 역사와 대중의 냉엄한 비판을 피해 갈수는 없다. 지금 고인이 되신 두 거인의 영전 앞에서 벌어지는 일들 또한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를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중이다. 장례가 끝날 때 까지만이라도 애도하고 추모하는 것이 우리의 인심이고 예의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두 인물의 평가는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얼마든지 논 할 시간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예기(禮記) 곡례(曲禮)편에 상사(喪事)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음미 해 볼 필요가 있다.

이웃에 상사가 있으면 (隣有喪)

방아를 찧을 때 노래로 장단을 맞추지 않으며 (舂不相)

마을에 빈소가 있으면 (里有殯)

거리에서 노래 하지 않는다. (不巷歌)

남의 상을 당하여서는 반드시 슬퍼하는 빛이 있어야 하고 (臨喪則必有哀色)

상여의 줄을 잡고는 웃지 않는다.(執紼不笑)

삼가 두분의 영전에 향을 사르고 술을 올려 명복을 비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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