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선유적(先有的)으로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이다. 사람 인(人) 글자가 이를 말해준다.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으면서 사는 것이 인생의 행로이다. 부부, 가족을 기본으로 하여 이웃과 더불어 같이 살 때에 인간은 안전과 행복을 확보할 수 있다. 고독한 인간, 소외된 가족, 단절된 사회는 결코 존립할 수 없다.
인류는 물물교환을 시작으로 하여서 사상과 문화를 교류하면서 하나의 지구촌으로 한발씩 다가갔다. 이제 바야흐로 ‘인류는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고 사는 하나의 대가족’(One Family under God)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하게 되었다. 가족은 함께 밥을 먹고 사는 최초의 끈끈한 식구 공동체이다. 그래서 식구(食口)라는 단어는 가장 아름답고 매력이 있는 단어이다.
인간이 공생공영하려는 몸부림이 만든 실크로드(Silk Road)는 고대사회에서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는 주요한 통로였다. 뽕잎을 먹고 사는 누에가 실크라는 비단 옷으로 변화하여서 세계를 누비게 되었다. 연약한 누에가 뽑아내는 가느다란 실이 인류의 문명과 문화를 혁신하였다.
그리고 검은 황금으로 불리는 향신료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커피를 비롯하여 각종 좋은 냄새를 풍기는 음식이나 화장품 및 기호식품들이 각광을 받게 되었다. 길이 생기면 물자는 사람의 이동과 함께 교류가 활발해진다. 사람과 물자가 이동을 하면 새 문명, 새 문화가 생기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보다 높은 고급의 의식주 문화가 교역을 통하여 이동하게 되었다. 앞으로는 각종 문화의 평준화가 도래할 것이다. 인류를 가족으로 생각하는 가치관이 형성된다면, 서로 도와주려고 아우성을 칠 것이다. 참사랑 실천에 앞서가려고 몸부림을 칠 것이다. 그런 경지가 천국의 생활이다. 고대의 우리 조상들은 육로를 통하여 실크로드를 개척하였다. 이제 우리는 해저터널을 창조해야 한다. 실크로드는 자연적으로, 장기간에 걸쳐서 조금씩 전진해 왔다. 그러나 해저터널은 계획적, 의도적, 고도의 과학적 방법으로 단기간에 발전하고 성장해 질 수 있다. 해저터널은 육지를 연결하고, 섬들을 연결하고, 육지의 판도를 재편성하게 될 것이다. 바다 영역을 육지로 확대하는 기적을 낳게 된다.
현대에 이르러 해저터널이 건설 개척 분야로써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은 한반도(韓半島)라고 하는 이름에서 그 특징이 드러난다. 반도(半島)는 주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지정학적 특징을 압축한다. 한국은 건축과 토목 분야에서 그 기술이 세계적 위상에 올랐다. 산을 뚫고서 터널을 만들었다. 자동차와 트럭과 열차들이 그 터널로 다닌다. 그런 기술의 꽃이 바다에 산재하는 섬과 섬을 연결하는 육교 건설 혹은 해저터널 건설이다. 이제 한국의 섬들은 아름답게 디자인 된 육교로 연결되어서 더 이상 섬이 아닌 경우가 급증하였다. 이런 기술의 축적은 개척을 향한 인간의 욕망 분출구로서 해저터널을 향하게 되었다. 한국과 일본은 이제 기술로는 충분히 한일 사이를 연결하는 해저터널을 건설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두 나라 사이의 정치적 미묘한 관계가 풀리지 않는 것이다. 정치의 물꼬가 트이면 경제 문화 교통 과학 교육 등의 교류가 증가하면서 시너지 효과가 엄청 날 것이다.
한일해저터널은 일본이 먼저 구상하였다. 1920년대에 일제가 조선 정벌을 위하여 해저터널을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것은 목적 자체가 지배와 폭력을 전제로 하는 비평화적이었다. 무력침략을 위한 목적이었기에 평화와 무관하였다. 그런 해저터널은 개통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이 제안은 역사 너머로 사라졌다. 그러므로 한일해저터널, 혹은 일한해저터널은 순수한 평화의 마음을 가진 마음에 의하여 구축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이 낳은 위인으로서 문선명.한학자 총재가 있다. 양위분은 통일교회 창시자로서 널리 인지된 종교인이었다. 그리고 각종 회사를 설립하여서 경제인으로서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교육가, 반공 민 승공사상가, 국제외교가, 한류문화 창달자 등의 명성을 남겼다. 특히 그는 일제 강점기의 탄압이 강화되던 문총재는 1920년에 평안북도 정주군,한학자 총재는 안주군에서 출생하여서 일제에 저항하고 독립을 쟁취하려는 애국의 혈통을 가졌다. 양위분은 군국주의로써 한반도를 짓밟은 일본을 미워하기보다는 사랑으로 품고 껴안으면서 한국과 하나가 되어서 아시아평화공동체의 주역이 되게 해야 한다는 미래 전망을 가졌다. 그의 비전은 한일국제축복결혼가정 증가와 함께 한일해저터널 선포에서 구체화되었다.
문선명총재는 일찍이 1951년 부산의 범냇골에 지은 작은 움막에서 부산 앞바다를 바라보면서 앞으로는 한일해저터널 개통 시대가 올 것을 전망하였다. 그는 연합군의 함정들이 부산으로 많이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북한군이 곧 패배할 것을 전망하였다. 그리고 미래에는 부산이 태평양시대를 여는 위대한 문으로서 항구도시가 될 것을 예견하였다. 그 꿈이 한국과 일본은 해저터널을 중심삼고 하나의 국가처럼 공생 공영할 것이며, 또 그러해야만 한다고 예견하였다. 그의 생각은 한국과 일본과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를 위한 비전의 씨앗이었다.
양위분의
이 비전은 30년이 지난 1981년 11월 1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10차 국제과학자 통일회의(ICUS)에서 한일해저터널을 포함해서 세계평화고속도로(International Peace High Project)를 제안하는 것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는 바다 밑으로 장거리를 단시간 내에 주파할 수 있는 고속철도와 자동차가 달리는 병행 초고속도로를 건설하려는 제안이었다.
이로부터 10년이 지나서 알라스카 베링해협을 다리와 해저터널로 연결하여서 미국과 러시아를 잇는 베링프로젝트를 발표하였다. 즉 1992년 10월 25일 미국 알라스카 코디악에서 베링해협을 연결하는 평화의 다리와 해저터널을 구축할 것을 예견하였다. 이 비전은 2005년 9월 12일 천주평화연합(Universal Peace Federation) 창설을 기념하는 메시지에서 공식적으로 발표를 하였다. 태평양시대는 위로는 베링해협평화의 다리와 해저터널을 건설하고, 아래로는 한일해저터널을 개통함으로써 실제적으로 본격화될 것이다.
이처럼 1981년에 한일해저터널 선포를 하였다. 그러나 이 제안이 실질적인 효과가 있기 위하여 정치적 결단과 후원이 필요하였다. 종교적 배경을 의식하여 지지를 받기에는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었다. 다행히 노태우 대통령이 일본 의회 연설에서 해저터널의 필요성을 언급하였고,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 순방 때에도 언급하였다. 일본에서는 모리요시 총리가 해저터널을 제의하였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도 이를 언급하였고, 이어서 일본 자민당은 ‘해저터널은 국가 건설의 꿈’을 슬로건으로 정하였다.
최근에는 일본측 연구기관과 부산발전연구원이 개설되었고, 상호 공동 심포지엄과 토론회 등을 통하여 공론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두 국가 사이에 과거사 청산 문제가 대두되면서 해저터널 여론은 싸늘해졌다.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도 ‘한일해저터널연구회’는 지속적인 관심과 준비를 해 왔다. 그리고 부산시장이 부산을 국제도시로서 성장시키기 위하여 새 비전을 제시하면서 한일해저터널을 포함시켰다. 부산상공회의소와 부산글로벌포럼과 부산경제살리기시민연대가 공동으로 동참하였다. 미래를 내다보면서 한일 양국이 새로운 우호관계를 형성하여 동북아와 세계평화를 구현하는데 우선적으로 한일해저터널 건설의 중요성과 필요성이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박성열 박사 UPF(천주평화연합)부산광역시 지부장,사)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 부산회장 세계평화도로재단 자문위원,사)한일터널연구회 이사
人間は元来、独りで生きることができない存在である。「人」という文字がそれを物語っている。助けてあげ、助けてもらいながら生きるのが人生の行路である。夫婦、家族を基本として隣近所ともともに生きるとき人間は安全と幸福を確保することができる。孤独な人間、疎外された家族、断絶された社会は決して存立することができない。
人類は物々交換を始め、思想と文化を交流させながら一つの地球村に一歩ずつ近づいてきた。今やまさに「人類は神様を父母として侍って生きる一つの大家族(One Family under God)」という事実を誰もが認めるようになった。家族は共に食事をして生活する最初の濃密な食口(シック)共同体である。それゆえ食口(シック)という単語は最も美しく魅力のある単語である。
人間が共生共栄しようとする苦闘がつくったシルクロード(Silk Road)は古代社会で世界を一つに連結する重要な道路であった。桑の葉を食べて生きる蚕がシルクという絹の服に変化して世界を駆け巡るようになった。か弱い蚕が紡ぎだす細い糸が人類の文明と文化を革新した。
そして黒い黄金と呼ばれる香辛料が広く使われはじめた。コーヒーをはじめ各種の芳香のある食べ物や化粧品、そして嗜好食品が脚光を浴びるようになった。道ができれば物資は人の移動とともに交流が活発になる。人と物資が移動すれば新しい文明、新しい文化が生じるのは自然の道理である。より高級な衣食住文化が交易を通して移動するようになる。これからは各種の文化の平準化が到来するであろう。人類を家族として考える価値観が形成されれば、互いに助け合おうと大騒ぎになるであろう。真の愛の実践に先を争って取り組むようになるであろう。そのような境地が天国生活である。古代の私たちの先祖は陸路を通してシルクロードを切り開いた。今や私たちは海底トンネルを創造しなければならない。シルクロードは自然的に長期間にわたって少しずつ前進してきた。しかし海底トンネルは計画的、意図的、高度な科学的方法によって短期間に発展し成長させることができる。海底トンネルは陸地を連結して島々を連結し、陸地の版図を再編成するようになるであろう。海の領域を陸地に拡大する奇跡を生み出すようになる。
現代に至り、海底トンネルが建設開拓分野として注目されている。韓国は韓半島という名前にその特徴が現れる。半島は周辺三面が海に囲まれている地政学的特徴を圧縮する。韓国は建築と土木分野でその技術が世界的レベルに上がった。山を貫いてトンネルをつくった。自動車とトラックと列車がそのトンネルで行き来する。そのような技術の華が、海に散在する島と島を結ぶ陸橋建設あるいは海底トンネル建設である。今や韓国の島々は美しくデザインされた陸橋で連結され、もはや島ではない箇所が急増した。このような技術の蓄積は、開拓を目指す人間の欲望の矛先として海底トンネルに向かうようになった。韓国と日本は今や技術では十分に韓日間を結ぶ海底トンネルを建設す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った。問題は両国間の政治的に微妙な関係が解かれないことである。政治の扉が開けば経済、文化、交通、科学、教育等の交流が増加してシナジー効果が非常に大きくなるであろう。
韓日海底トンネルは日本が先に構想した。1920年代に日帝が朝鮮統治のために海底トンネルを建設する計画を立てた。しかしそれは目的自体が支配と暴力を前提とした非平和的なものであった。武力侵略のための目的であったので平和と無関係であった。そのような海底トンネルは開通してはならないのである。それゆえこの提案は歴史とともに消えていった。したがって韓日海底トンネルまたは日韓海底トンネルは純粋な平和の心をもって構築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ある。
韓国が生んだ偉人として文鮮明総裁がいる。文総裁は統一教会の創始者として広く認知された宗教人であった。そして文総裁は各種の会社を設立して経済人としても注目された。さらに教育家、反共・勝共思想家、国際外交家、韓流文化喧伝者等の名声を遺した。特に文総裁は日帝強制占領期の弾圧が強化された1920年に平安北道定州郡で出生し、日帝に抵抗して独立を勝ち取ろうとする愛国の血統を持った。文総裁は軍国主義で韓半島を蹂躙した日本を憎むよりも愛をもって抱きかかえ、韓国と一つになってアジア平和共同体の主役となるようにすべきだという未来への展望をもった。文総裁のビジョンは韓日国際祝福結婚家庭の増加とともに韓日海底トンネルの宣布で具体化された。
文鮮明総裁はかつて1951年に釜山のポムネッコルに建てた小さな小屋から釜山の沖を眺めながら、これからは韓日海底トンネル開通時代が来ることを展望した。文総裁は連合軍の艦艇が釜山にたくさん入って来るのを見ながら北朝鮮軍が間もなく敗北すると予想した。そして将来、釜山が太平洋時代を開く偉大な門としての港湾都市となることを予見した。また、韓国と日本が海底トンネルを中心として一つの国家のように共生共栄するであろうし、そうあるべきだと予見した。文総裁の考えは韓国と日本とアジアと世界の平和のためのビジョンの種であった。
文総裁のこのビジョンは、30年を経た1981年11月10日、ソウルの世宗文化会館で開催された第10回科学の統一のための国際会議(ICUS)で韓日海底トンネルを含めた世界平和高速道路プロジェクト(International Peace Highway Project)を提案することで具体化された。これは海の下で長距離を短時間内に走破することができる高速鉄道と自動車が走る並行超高速道路を建設しようという提案であった。
それから10年を経て、アラスカのベーリング海峡を橋と海底トンネルで連結して米国とロシアを結ぶベーリングプロジェクトを発表した。すなわち、1992年10月25日、米国、アラスカのコディアックでベーリング海峡を連結する平和の橋と海底トンネルを構築することを予見した。このビジョンは2005年9月12日に天宙平和連合(Universal Peace Federation)創設を記念するメッセージで公式的に発表された。太平洋時代は、上ではベーリング海峡平和の橋と海底トンネルを建設して、下では韓日海底トンネルを開通することで実際的に本格化するであろう。
このように1981年に韓日海底トンネルの宣布をした。しかしこの提案が実質的な効果を得るためには政治的決断と後援が必要であった。宗教的背景を意識して支持を受けるには時間がかかるものであった。幸いに盧泰愚大統領が日本の議会演説で海底トンネルの必要性に言及し、金大中大統領が日本歴訪の際にも言及した。日本では森喜朗総理が海底トンネルを提議した。2003年に盧武鉉大統領もこれに言及し、続いて日本の自民党は「海底トンネルは国家建設の夢」をスローガンに決めた。
最近では日本の研究機関と釜山発展研究院が開設され、相互共同シンポジウムと討論会等を通して公論化を試みた。しかし両国間の過去の歴史清算問題が取りざたされるにしたがって海底トンネルの世論は冷え込んでいった。冷淡な雰囲気の中でも「韓日海底トンネル研究会」は持続的に関心を寄せ準備を行ってきた。そして釜山市長が釜山を国際都市に成長させるための新しいビジョンを提示し、それに韓日海底トンネルを含めた。釜山商工会議所と釜山グローバルフォーラムと釜山経済を生かす市民連帯が共同で参加した。未来を見通して韓日両国が新しい友好関係を形成して東北アジアと世界の平和を実現する上で、優先的な韓日海底トンネル建設の重要性と必要性が再び取りざた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であろう。
飜譯:船越隆昭 國際 Highway 財團 理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