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야지 장군’ 전기항이 자금을 댔던 예천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도야지 장군’ 전기항이 자금을 댔던 예천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 금보리 논설기자
  • 승인 2020.10.12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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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말 경상도 서북부 지방은 정봉준의 전라도에 가려있지만 그 못지않게 동학혁명의 뜨거운 현장이었다. 예천은 동로(현재는 문경시 소속), 유천, 용문면이 동학의 치열한 현장이었다.

필자가 재야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을 서울의 한 모임에서 만났을 때 들은 얘기다. 1990년대 초 ‘동학농민전쟁 백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가 답사 기행 때 김제 고창 장흥 진주 예천의 향토사학자들을 두루 소개했다. 예천 향토사연구회장인 정양수선생이 북부경북에서 전통이 깊은 대창중고등학교 교감(당시)으로 근무할 때 들은 내용도 들려 줬다. 정 교감이 동학 당시 농민군을 공격하려 조직한 집강소가 예천군 관아의 객관에 있었다는 사실, 지주들의 재산을 빼앗던 농민군 11명이 관군측에 의해 끌려가 한천 모래 사장에 생매장 된 사실 등도 추진위원회에 알려주었다고 한다. 정양수 선생의 도움 등으로 예천을 중심으로 상주·김천·선산 등지의 유적을 조사하고 답사해 증언과 사료를 발굴한 내용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발표했던 신영우 충북대학교 교수도 필자는 만나 동학운동에 대해 얘기를 들었다.

관군의 세력이 컸던 고장 예천서 봉기 피해자 많이 나와

1894년 상주, 안동, 의성, 예천에서는 지역사회는 치열한 갈등이 벌어졌다. 이 지역 양반 지주 토호에 맞선 하층민들이 못살겠다면서 저항에 나섰다. 당시 실정은 대다수 농민들은 지주 아전들의 수탈에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떠나기 까지 할 정도로 생활이 처참했다. 소작인들은 최소 5할 많게는 7할까지 소작료로 내야 했다. 뜨거웠던 그해 동학혁명농민군 재정후원자 전기항(0000년~0000년, 별명 도야지)은 그런 점에서 실로 눈에 띄는 인물이다. 만석이야 되기 어려웠겠지만 천석이 넘으면 보통 만석꾼 부자라고 한다. 상당한 지주였던 그가 동학 농민군에 편에 선 것이다. 있는 자가 더 끌어 모으려는 것은 오늘이나 옛날이나 마찬가지인데 전기항의 선택은 보통사람들과 함께하는 세상을 열겠다는 고귀한 뜻이다. 물론 농민군을 묶은 것은 소수 양반들도 참여가 이들의 봉기를 견인했다. 동학의 이념이었다.

낙동강 주변의 일본 병참기지를 습격하여 타격을 입히기도

초기에는 북접의 지시를 받고 있던 탓인지 관아를 점령하는 지경까지 이르지 않았으나, 2차 봉기 무렵에는 성주, 상주, 선산, 김산(김천) 등지의 읍성이 함락되었고 낙동강 주변의 일본 병참기지를 습격하여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이런 속에서 예천은 농민군의 희생이 컸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이곳은 양반, 토호, 아전 구실아치들이 연합세력으로 뭉쳐 농민 소상인을 묶은 농민군과의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농민군이 패배하여 많은 살육이 따랐던 것이다.(신영우의 <갑오농민전쟁과 영남 보수세력의 대응>)

예천지방의 지도자는 최맹순이었다. 그는 본래 강원도 춘천 사람으로, 약관에 동학에 입도하여 몸을 숨기며 동학 경전을 익혔다. 그가 예천군 동노면 소야리로 들어와 예천지방의 동학혁명을 지휘했던 것이다. 이웃집에 사는 장복극을 동학에 끌어넣기도 하면서 동학조직을 넓혀 나갔다.

최맹순은 타향 경북에서 옹기 장사를 했다. 동로는 예부터 흙이 좋아서 도자기 생산 장소였고, 좋은 옹기가 생산되었다고 한다. 그가 여러해 옹기를 팔고 다닌 것은 생계를 위해서 였는지 아니면 신분을 가장키 위해서 였는지 모르나 행상(行商)은 천출(賤出)이나 가난한 사람들의 밥 벌이 직업이다.

1894년 3월 보은집회, 이듬해 3월 고부봉기가 한창 일어날 무렵, 최맹순은 외딴 예천 동로면 소야마을에 접소를 차리고 ‘관동수접주’라면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몇달만인 6~7월에는 면과 리 단위에까지 조직을 만들어 48개 접소에 7만여명을 끌어들였다.

관군측의 기록에는 농민군을 평가절하하는 내용이 있다. "큰 접소는 1만여명, 작은 접소는 몇천명이 되었는데 시정의 불량청소년, 농부, 노비, 머슴 따위들이 마을을 노략질하고 돈과 재물을 빼앗으며 무기를 도둑질하고 남의 노새와 말을 몰아가고 남의 묘를 파헤쳤다. 사사로운 원수를 갚으려 사람을 묶어 두들겨 패서 더러 죽이기도 했다."(<갑오척사록>)

예천에 동학은 예천 읍내를 제외하고는 서북지역의 행정을 장악하고 향촌질서를 재편하고 있었다. 또 금당 맛질(현 용문면)함양박씨의 유계소를 농민군이 빼앗아 접소로 삼는 등 큰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금곡접소에는 몰락양반이자 소작농을 하던 함양박씨들도 농민군에 가담했거니와 만석꾼으로 이름난 전기항이 모량도감이 되어 경비를 대고 있을 정도였다. 도야지(돼지의 우리말)는 "돈 많고 풍채 좋다"는 명성이 금당실을 비롯한 북삼면 일대에 소문이 자자했다고 알려졌다. 농민군은 7월 들어 안동진 영장을 지낸 토호 이유태를 끌어내 폭력을 가하고 재물을 빼앗아가기도 하고, 읍내로 들어와 악질 아전(구실아치)이라며 김병운을 두들겨 패고 그의 아비 묘를 파내었다.

더디어 계급투쟁이 된 동학은 예천 읍내의 양반층과 중인계급인 향리(아전)들은 집강소(보수 집강소로 구별해 명명)라는 이름으로 예천군 관아 객관에 본부를 두고 1천5백여 명의 민보군을 조직해 농민군에 대응할 준비를 했다.

금곡접 소속의 농민군 수십 명이 8월9일 북부 구산마을(현 예천읍 북동쪽)에 들이닥쳐 지주 집을 습격했다. 이때 민보군이 출동하여 용문면에 사는 농민군 11명을 잡아 왔다. 농민군이 "곧 동학 세상이 온다. 금당실 화지의 동학군이 온다. 우리를 죽이면 너희들이 살아 남을 수 있을 것 같으냐"고 큰소리치자 이들을 예천의 중심 하천인 한천 냇가로 끌고 가 생매장하였다.

금곡포덕소와 화지도회에서 관군측 집강소에 함께 일본 공격에 나서자고 요구

동학농민군측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런 와중에 금곡포덕소와 화지도회에서는 관군측 집강소에 함께 일본 공격에 나서자고 요구했으나 관군측 집강소에서는 묵살했다.

농민군의 연합부대 상주, 용궁, 안동, 풍기, 영천, 문경, 단양 등의 13접주가 예천읍을 공격한다는 글을 보냈다. 그리고 북쪽의 금당실 송림, 서쪽의 화지 마을에 수만 명의 농민군이 집결했다. 일종의 예천읍 봉쇄 전술이다.

실제로 예천읍내는 절박했다. <갑오척사록>은 "읍내의 방수가 거의 한달 동안 밤낮으로 계속되어서 사람들이 잠을 자지 못하고 저자와 길 막힌 것이 또 한달 가까이 되어 땔감과 양식이 끊어져 읍내 백성들이 모조리 주려 있고 울부짖는 소리가 진동하고 있다"고 했다.

유명한 서정자전투가 벌어졌다. 관군과 민보군이 동학군에 먼저 공격을 했다가 퇴각하자 동학군은 행동을 개시하였다. 8월28일 한낮 화지농민군 수천명이 읍내 10여리 지점에 나와 진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협공을 약속한 금곡의 농민군은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양쪽의 싸움은 밤까지 이어졌는데 갑자기 남쪽 산에 횃불이 오르면서 안동의 구원병 3천명이 온다고 외치는 소리를 들은 농민군은 일시에 무너져 달아나다가 서정자 들판의 동남평 논에 무수한 시체를 남기고 퇴각했다. 민보군이 읍내로 들어와 승리를 자축할 적에 금곡의 농민군이 진격해왔으나 민보군은 일제히 나서 농민군을 퇴각시켰다.

이렇게 승리를 장식한 이튿날 일본군이 들이닥쳤고 민보군은 금곡의 농민군 포덕소인 유계소 건물에 불을 질렀다. 무수한 농민군이 잡혀 죽었으나 최맹순과 전돼지는 몸을 숨겼다. 동학농민군이 처음부터 읍내를 공격했으면 관아를 접수했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봉쇄전술이 착오였다는 것이다.

최맹순은 강원도 평창으로 가서 농민군을 규합해 충청도를 거쳐 다시 예천을 공격했고 이어 충주 독기령을 넘나들며 활동을 벌였다.

전기항은 문경의 산속에서 화전민 생활...가을 도토리로 겨울 연명

실패한 동학혁명에 가담한 농민군측의 피해는 상상도 하지 어려울 정도로 가혹했다. 최맹순은 11월21일 아들 최한걸, 동료 장복극과 함께 잡혀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들이 가진 재산은 모두 빼앗겼다. 용문면 하금곡리는 동학의 소굴이라며 쑥대밭이 됐다.

최맹순과 함께 동학혁명의 2대 지도자인 금곡포덕소의 모량도감 전도야지는 산속으로 피신해 목숨은 부지한 전설을 남기고 있다. 관군에 도망을 다니다가 객지를 떠돌다가 전기항은 아들과 훗날 금당실로 되돌아와 소작생활을 했다. 그의 많은 재산은 모두 관군과 예천읍내 아전(구실아치)들에게 빼앗겼다 한다. "만석꾼 살림 아전들이 다 뺏어가"라고 ‘전 도야지’의 손자며느리(정금섭)는 생전에 증언했다. 전기항의 가족들은 문경의 산속에서 화전민 생활을 했다. "화전민 생활을 하면서 겨울 양식은 가을에 주워둔 도토리 껍질을 벗겨 방아로 찧어 먹었어." 정 할머니가 예천군 용문면 금당실에 전기항의 손자인 전일호씨에게 시집왔을 때는 시할아버지(전기항)와 시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뜬 뒤였다. 한 시대 정의의 깃발을 들었다가 가문이 풍비박산났다. 가까운 용궁전씨 집안에서도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우리겨레의 영원한 노래 ‘아리랑’의 고개처럼 힘든 고비길을 넘겨야 했던 것.

‘동학농민전쟁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에서는 언론매체 홍보에도 나섰다. <전북일보>에서는 박맹수 교수를 중심으로 기행글을 1년 동안 연재했다. 특히 <한국방송 KBS>에서는 100돌 특집으로 지난 1994년 5월 ‘동학농민전쟁 100년’을 4부작으로 제작, 방영해 관심을 끌었다. 장해랑 피디(현 EBS 사장)가 진행했는데 그는 예천 출신으로 대창고등학교 출신이다.

예천 금당실과 문경 동로에 한국지방의회정치의 원형이라고도 볼수 있는 금당실 포덕소 등 동학 관련 유적을 복원해 봄직하다. 황해도 해주에서 아기접주로 명성을 떨친 김창수(백범 김구)는 살아남아 대한민국 정부의 기원으로 삼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 되는 등 동학은 실로 우리 근대를 여는 시대의 여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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