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의 대표적인 반독재 민주 투사 이종섭
대구경북의 대표적인 반독재 민주 투사 이종섭
  • 대구경제
  • 승인 2018.07.28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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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 2014년12월12일자 인터뷰 기사 전재>

 

장면 정부 때 ‘2대 법안’반대시위···53년만에 무죄 판결받은 이종섭씨

“2대 법안 사건으로 기소…재직 학교에 누 될까봐 두 번이나 이름 바꿨다”

 

명예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덕적 가치다. 우리는 세상에서 훌륭하다고 인정되는 이름이나 자랑 또는 그런 존엄이나 품위를 명예라 한다.

지난 10월16일 대구고법 제1형사부(부장판사 김현석)는 한 개인의 명예를 회복시킨 의미 있는 판결을 내렸다. 이승만 정권 붕괴 후 집권한 장면 정부가 추진한 ‘2대 법안’ 반대시위를 하다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이종섭씨(83) 등 3명에게 원심판결을 깨고 무죄선고를 내렸던 것.

이씨는 1961년 4월26일 민주주의와 사회정의를 위해 시위를 벌이다 소요 및 특수공무방해죄로 기소됐다. 이달초 53년 만에 무죄선고를 받은 이종섭씨를 만났다. 그는 54년 경북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61년 4월 원화여자중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2대 법안 반대 공동투쟁위원회’의 재정부원을 맡았다 시위사건에 연루됐다.

1970,80년대 경상북도(대구포함) 중앙정보부, 경찰의 사찰 1호였던 민주투사 이종섭씨(구명 이원수)

 

반공임시특별법·데모규제법은
혁신계 정당 정치활동 봉쇄법안
시민궐기대회 참석하러 가다가
경찰과 몸싸움한 것 뿐이었는데
특수공무집행방해죄로 기소돼

경북대 졸업후 교수직 제의 거절
삼선개헌저지·유신·5공 반대 등
민주주의·정의 위해 고난의 길

소 몰고 휴전선 넘은 것에 감동
정주영씨의 국민당에 입당했다

젊은이 사람되기 위해 공부해야

53년 만에 사법부에 의해 명예를 회복한 이종섭씨가 대구시 중구 진골목에서 영남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53년 만에 명예를 회복했다. 어떤 느낌인가.

“사필귀정이라고 생각한다. 법정 최후진술에서 가정이 풍비박산이 났다, 사람은 한 번 살다가 죽는데 조상 볼 면목이 없다, 후손에게 전과자로서 큰 부채를 남겨선 안 된다, 누명만은 벗겨다오, 재판부가 그 점만은 알아 달라고 했다. 잘못된 사법적 판결에 의해 국민의 세금으로 보상을 받는다는 게 가슴이 아프다.”

▲‘2대 법안’은 어떤 법안인가.

“반공임시특별법과 데모규제법이다. 반공이라는 미명하에 야당, 특히 혁신계 정당의 정치활동을 봉쇄하려는 법안이었다. 당시 전국의 주요일간지를 비롯해 언론, 학계, 시민사회단체 등 여론은 악법이라며 반대했다. 1961년 3~4월 중순까지 2대 법안 폐지를 위한 범국민적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사건의 경위는 어떠했나. 또 재판부가 무죄선고를 내린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1961년 4월2일 대구시 전동에 있는 경북교원노동조합 사무실 앞에서 100여명의 시민과 함께 법안철회를 요구했다. 시민궐기대회 장소인 대구역 앞 광장으로 가려다 경찰과 몸싸움을 벌인 것뿐인데 경찰은 폭행, 협박 등 특수공무집행방해로 기소했다. 게다가 진압경찰에 의해 집회까지 무산됐다. 2010년 이 사건의 재심을 청구했고, 법원이 2013년 재심개시결정을 내려 지난 10월, 53년 만에 누명을 벗었다. 재판부가 폭력행위와 협박 등을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한 것이다.”

▲이름이 이원수에서 이종섭, 다시 이동재에서 이종섭으로 바뀌었는데 왜 바꿨나.

“의성군 구천면 위성리 산구마을이란 곳에서 태어났다. 12대조 할아버지의 함자와 같아 아버지가 60년대 초에 종섭으로 이름을 바꿨다. 61년 4월초 ‘2대 법안’ 사건으로 기소되자 재직하던 학교에 누가 될까봐 동재로 바꿨다가 다시 종섭으로 개명했다.”

▲90년대 펴낸 ‘발가벗은 세상보기’란 자서전을 봤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6·25전쟁, 4·19혁명 등을 거치면서 연행, 고문, 투옥 등 여러 고초를 겪었더라.

“일제강점기 초등학교 6학년1학기 때 작업조장을 하다 일본인 교장에게 반항했다는 이유로 무기정학을 받았다. 광복 후에는 중학교 2학년 때 동료 7명과 비리교사 퇴진운동을 벌이다 20일간 의성경찰서에 감금됐다. 구타도 많이 당했다. 경찰이 그 일을 ‘독서회 사건’으로 조작해 좌익으로 몰았다. 구사일생으로 풀려났는데 나머지 친구들은 6·25전쟁 중 김천교도소로 이감돼 총살됐다. 또 경북대가 설립되기 전 대구대학 정치학과를 다니면서 당시 학장의 공납금횡령비리를 규탄하다 제적당했다. 언급한 것처럼 ‘2대 악법’ 반대시위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다. 이 밖에 삼선개헌저지, 유신독재와 5공군사정부 반대 등 근현대사의 분기점마다 민주주의와 사회정의를 위해 고난과 역경을 마다하지 않았다.”

▲2대 법안 반대시위 주도혐의로 구속된 가운데 1심 법정 최후진술에서도 거침없고 당당하게 임한 것 같다.

“나의 신변이 민주당 정권에서 5·16군사정부 혁명재판소로 넘어갔다. 검사가 10년 구형을 했는데, 2대 악법 반대는 용공·이적행위가 아니라 애국행위라고 했다. 이어 10년을 구형한 것은 검사가 법률에 무식하거나 독재정권의 하수인을 자처하는 법률 브로커일 뿐이라고 쏘아붙였다. 재판장에게도 당신은 일제강점기 일본육군 장교로 천황폐하만세를 부르며 대동아공영권을 완수하기 위해 전쟁에 참전한 전범집단의 일원이고 나는 민족사업의 일환으로 애국운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일갈했다. 재판장이 ‘욧시’(일본 말로 ‘좋아’라는 뜻) 하며 탁자 위에 있는 조서기록을 내동댕이치더라.”

▲괘씸죄가 추가된 것이 아닌가.

“하하하.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게 괘씸죄라면 그렇다고 할 수 있겠다.”

▲부모님이 많이 걱정했을 것 같다.

“아버지가 그만 잘못했다고 하지 왜 그랬노 하며 최후형량을 걱정하셨다. 그러면서 내가 들어도 흐뭇하더라, 마음 푸근하게 먹고 5년 산다고 마음먹으라고 격려해줬다. 아버진 그런 분이었다. 영어의 몸이 된 지 3년 만에 출소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지금도 아버지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프다.”

▲대구대에 다니다 제적됐는데 경북대를 졸업했다. 어떻게 된 건가.

“6·25전쟁 통에 대학 은사의 주선으로 백낙준 문교부 장관을 만나게 됐다. 백 장관은 불의를 보고 분개할 수 있는 용기가 대단하다며 연세대, 고려대 등 어느 대학이든지 원하는 대학에 편입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52년 개교한 경북대로 가고 싶다고 했다. 경북대 정치학과에 편입해 공부하면서 2대 총학생회장을 했다. 졸업 후 당시 고병관 총장이 대학의 발전을 위해 교수로 남아달라고 하기에 교수는 지식이 많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치와 통일운동은 신명을 바쳐야 하는데 누구나 할 수 없다고 거절했던 기억이 있다.”

▲본격적인 정치활동은 언제부터 했나.

“대학 졸업 후 공군에 입대했다. 정치를 하기 위해 대위로 특별전역을 했다. 공군에 근무할 때 진보당 당수 조봉암이 쓴 ‘평화통일론’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 조봉암은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에 진 다음 간첩혐의로 사형당했다. 나는 28세 때 사회대중당 경북도당 총무부장으로 정당에 가입한 뒤 통일사회당, 대중당, 민주통일당, 국민당, 신민당, 국민당으로 옮기면서 정치활동을 했다.”

▲정치적 궤적이 비주류로서의 삶이다. 후회하지 않나.

“아니다. 오히려 비단길이었다.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자기 몫을 가지는 치부의 의미에서 출세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벼슬보다 학문, 학문보다 경륜이 우선이라고 공자가 말했다. 국회의원 당선 기회가 서너 번 있었으나 정치적 소신과 신념을 바꾸고 싶진 않았다.”

▲정치개혁을 주창했던 사회대중당이 실패로 끝난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사람, 특히 영남권이 변화와 발전을 두려워한다. 자금력이 부족했고, 여당은 북풍을 이용했다.”

▲정치활동 이외에 보람있었던 일은 없나.

“84년 민족통일촉진회 대구지부장으로 있던 중 대구시가 동구 신암동 선열묘역 자리에 아파트단지를 추진하기 위해 이장을 한다고 했다. 조국독립을 위해 신명을 바친 선열의 묘소가 건설업자의 상혼에 쫓겨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더라. ‘대구선열묘역보존관리추진위원회’를 조직해 이전을 저지했다. 그 가운데 이권사업을 주겠다며 손을 떼라는 회유가 있었지만 보존을 관철시켰다.”

▲지금도 이념과잉시대가 아닌가.

“8·15는 미완의 광복이다. 국토가 분단되고 민족이 분열됐다. 이는 우리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을 하지 못해 강대국의 전후처리에 발언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못했다. 반민특위를 없애고 이승만이 친일파를 중용한 게 비극의 싹이다. 한민당 역시 지주를 중심으로 하는 친일세력이었다. 좌·우 이념대결로 볼 게 아니라 ‘자주와 외세’라는 시각에서 봐야 한다.”

▲지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30대 때 영덕에서 3선개헌반대 투쟁위원회에 참여해 유세를 했다. 당시 이기택, 우홍구 등 민주당 후보는 투표에 참가해 부표를 원했는데, 나는 거부하고 투쟁의 길을 택했다. 영덕에서 백남억 공화당 의장을 만났다. 그는 대학 때 은사다. ‘욕본다’고 하면서 공화당으로 오라고 하더라. 당시 청와대 대변인도 대학 은사였다. 그때 공화당으로 갔으면 지금의 인생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편한 길을 가지 않았다. 사람은 짐승과 달리 인격과 인품을 가지고 있다. 그게 없으면 살아있어도 짐승과 마찬가지다.”

▲젊을 때 누구와 주로 어울렸나.

“최석채, 최해청, 유일지, 조윤제, 백남억 이런 분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자주 만났다.”

▲진정한 리더십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상대방을 배려해주고 인정해주는 것이다.”

▲정주영씨가 창단한 국민당에 입당한 것을 끝으로 정치활동을 마감했다. 국민당엔 왜 입당했나.

“소를 1천마리나 끌고 휴전선을 넘어 북한에 가는 것을 본 뒤 그의 매력에 빠졌다. 한국정치가 혁신이니 보수니 하는 것을 떠나서 시대적인 작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젊은이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자기의 모습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취직하기 위해 공부하지 마라. 사람되기 위해 공부해라. 공부란 남을 위해 하는 거다. 사회에 이익이 돼야 한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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