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마을엔 "왜놈 상관 쏘시오" 라고 새겨진 한글이 아직 보존
중국 마을엔 "왜놈 상관 쏘시오" 라고 새겨진 한글이 아직 보존
  • 대구경제
  • 승인 2018.08.14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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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국서 잊혀졌지만 中 오지 마을선 아직도 기념행사

“왜놈 상관놈들을 쏴 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 오시오”

"왜놈 상관을 쏴 죽이고 조선의용군으로 오시오" 윈터우디촌 입구 누각의 담장에는 1942년 이 곳에 주둔했던 대원들이 새긴 한글 격문이 아직도 남아 있다. [진중=예영준 특파원]

 

중국 산시(山西)성 쭤취안(佐權)현 원터우디(雲頭低)촌에 들어서자마자 마을 초입의 누각 담장을 도배한 한글이 눈에 들어왔다. 담벼락에 남아 있던 글 위에 페인트로 덧칠한 것이었다. 마을 주민 리빙전(李丙珍ㆍ56)은 “우리 마을에 조선의용대가 주둔하면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는 얘기를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랐다”며 “마을에 한글을 아는 사람은 없지만 비바람에 글씨가 희미해지면 다시 칠을 입혀 영원히 지워지지 않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타이항(太行)산맥 자락에 있는 이 마을은 1942년 조선의용대가 주둔지로 삼던 곳이다. 당시 대원은 부녀대원을 합쳐 약 150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타이항산맥은 당시 일본군과 대치하던 항일 전쟁의 최전방이었다. 울산바위 만한 암벽이 첩첩으로 이어진 지형이 일본군의 전진을 막는 자연 방어선이 된 것이다.

누각 담장의 한글은 이 일대에서 대치 중이던 일본군 부대원 가운데 조선인 출신들의 탈영과 귀순을 권유한 글이었다. 나머지 담벽에는 “강제병으로 끌려난 동포들, 조선의용대가 있으니 총을 하늘로 쏘시오”“조선말을 자유로 쓰게 (일본군 상관에게) 요구하자”는 등의 글씨가 씌어져 있었다. 마을 안에는 순국선열유족회가 2002년 와서 세운 순국선열전적비가 있다.

원터우디에서 북쪽으로 270㎞ 거리에 있는 허베이(河北)성 후자좡(胡家庄)촌의 초등학생들은 ‘조선의용대 추모가’를 한국어 발음으로 부른다. 1941년 12월 일본군이 이 마을까지 침입했을 때 맞서 싸운 대원들을 기리는 행사를 매년 개최하면서 부르는 노래다.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일본군 포로가 됐던 의용대 분대장 출신의 소설가 김학철(1916∼2001)이 지은 가사에 곡을 붙인 것이다. 조선의용대는 중과부적의 이 전투에서 대원 4명을 잃었다. 주민들은 일본군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산너머 황베이핑(黃北坪) 마을까지 시신을 메고 가 안장했다. 희생자 4명 중 한 명인 손일봉의 비석에는 ‘상하이 윤봉길 투탄 의거(1937년)의 공모자’라고 적혀 있다. 조국 독립의 일념으로 10년 넘게 중국 대륙을 누비던 젊은 넋이 끝내 광복을 보지 못하고 이역땅에 묻힌 것이다.

조선의용대 대원이 숙소로 삼았던 후자좡촌의 민가. 비상 대피로로 쓰던 지하 창고도 그대로 남아있다. [후자좡=예영준 특파원]

 

영화 ‘밀정’과 ‘암살’로 유명해진 독립투사 약산 김원봉(1898 ~ 1958)과 경남 밀양의 한 동네에서 나고 자랐고 약산이 창설한 의열단과 조선의용대의 중추 인물이었던 윤세주도 타이항산의 넋이 됐다. 1942년 일본군의 대대적인 소탕작전에 맞선 반격을 지휘하다 희생된 것이다.

또 다른 지도자 진광화(본명 김창화)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장례식은 같은 시기 전사한 중국 홍군 지도자 쭤촨(佐權) 장군과 함께 성대하게 치러졌고 현재 허베이성 한단(邯鄲)에 있는 중국 국립묘지 격인 열사능원에 묻혀 있다. 하지만 중국으로 귀화하고 공산당에 입당했던 진광화의 묘는 장대한 쭤촨 묘 바로 옆에 크게 모셔진 반면 귀화도 않고 입당도 하지 않았던 윤세주의 묘는 비교적 간소한 일반 열사 묘역에 잠들어 있다.

이밖에도 남북으로 400㎞로 이어지는 타이항산맥 곳곳에는 조선의용군의 발자취가 서려 있다. 스먼촌, 난좡촌 등 4곳의 본대 주둔지와 전투지, 2곳의 희생자 묘역과 간소하게 차려진 스먼촌 기념관 등 10곳을 둘러보는데 꼬박 사흘이 걸렸다. 산시성 샹우촌에는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무명 대원의 묘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의용대가 험준한 타이항산을 근거지로 삼게 된 건 독립운동가들의 노선 다툼과 중국 내 정세가 얽힌 결과다. 1930년대 후반 임시정부 요인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국공합작 아래에서의 중국 임시수도인 충칭(重慶)으로 이동했다. 임정 군무부장이던 약산 김원봉도 그 틈에 있었다. 하지만 무장투쟁론을 굽히지 않았던 약산은 후방 충칭에서의 활동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휘하에 있던 의용대원을 전투 지역인 화북(華北)지방으로 이동시켰고 최전방인 타이항산으로 들어간 조선 의용대는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과 연계해 활동하게 됐다.

당시 공산당과의 관계는 두고두고 남북에서 조선의용대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해방과 함께 약산은 서울로 귀국했으나 그는 좌익으로 몰려 체포되는 등 탄압 끝에 48년 북으로 갔다. 한 때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지내기도 했지만 그는 1958년 무정 등 연안파와 함께 김일성에 의해 숙청됐다. 타이항산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군의 일부도 해방 후 북한으로 넘어갔지만 그들을 이끌었던 무정 역시 숙청당했다. 결국 북에서 조선의용군은 완전히 잊혀진 존재가 됐다.

제 대접을 못받은 건 남한에서도 마찬가지다. 금기시되던 조선의용대 연구가 1990년대에 시작되고 윤세주 등 희생자들에게는 훈장도 수여됐지만 본격적인 재평가는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최근 8ㆍ15를 앞두고 베이징 교민들과 함께 타이항산의 조선의용군 유적지를 답사한 정원순 베이징 한인회 부회장은 “보존상태가 썩 좋지는 않지만 좀처럼 찾기 힘든 중국 오지에 조선의용대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며 “우리 국민 누구든 임시정부나 안중근ㆍ윤봉길 의사를 기억하고 있지만 가장 치열한 최전선에서 피를 흘리며 조국 독립을 꿈꾸던 젊은 그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함께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타이항산(산시ㆍ허베이성)=예영준 특파원 (이 기사는 중앙일보에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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