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비핵화 특집- 2000 2007 2018 남북정상회담 비교
한반도비핵화 특집- 2000 2007 2018 남북정상회담 비교
  • 조진구 경남대 극연 교수
  • 승인 2018.09.23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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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IFES현안진단

4.27 판문점선언에 따른 남북정상회담이 9월 18일-20일 평양에서 개최되었다. 이글에서는 2000년과 2007년, 두 번에 걸쳐 평양에서 개최됐던 남북정상회담과 이번 평양 남북정상회담이 형식면에서 어떤 차이점과 유사점이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한국 대통령의 세 번의 방북은 모두 2박 3일 동안 이뤄졌지만, 2007년 10월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육로로 평양을 방문했던 노무현 대통령과 달리 문재인 대통령은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이용했던 서해직항로를 이용했다.
  의전 면에서 보면 문재인 대통령은 최고의 예우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노 대통령은 인민문화궁전에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영접을 받았지만, 김대중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은 평양 순안국제공항에서 직접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영접을 받았다. 특히, 이번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 부부가 대통령 전용기에서 내려온 문 대통령 부부를 영접했을 뿐만 아니라, 김정은 위원장과 문 대통령이 인민군의 사열을 받는 동안 북한은 처음으로 21발의 예포를 발사하는 최고의 예우를 했다.
  둘째, 2000년과 2007년에는 북한의 헌법상 국가수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예방한 뒤 둘째 날 정상회담이 열렸지만, 이번에는 김영남 위원장과의 회담은 없었으며, 방북 1일차 오후와 2일차 오전 두 번에 걸쳐 김정은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우리 외교부 장관이 평양을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평양 남북외교장관 회담 혹은 공식수행원들이 참석하는 확대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에도 관심이 모아졌지만 실현되지는 않았다.
  정상회담 장소도 과거에는 대통령의 숙소였던 백화원 영빈관을 김정일 위원장이 찾아와 열렸지만, 이번 1일차에는 문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의 집무실이 있는 노동당 본부청사를 방문해 열렸고, 2일차는 김 위원장이 백화원 영빈관을 찾아와 열렸다.
  셋째, 배석자 수도 달랐다. 2000년에는 3명씩 배석하기로 한 합의에 따라 한국 측에서는 임동원 국정원장, 황원탁 외교안보수석, 이기호 경제수석이 배석했지만, 북측은 김용순 대남담당 노동당 비서만이 배석했다. 2007년의 경우 우리 측은 권오규 부총리, 이재정 통일부장관, 김만복 국가정보원장, 백종천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 조명균 안보정책비서관 등 5명이 배석한 데 반해 북측은 김양건 통일전선부장만 배석했다.
  그러나 이번 1일차 정상회담에서 우리 측은 서훈 국정원장과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북측은 김영철 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과 김여정 당 제1부부장이 배석했고, 합의문 발표 전에 열린 2일차 정상회담은 서훈 국정원장과 김영철 통일전선부장만 배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넷째, 합의문 발표 형식도 과거와는 달랐다. 2000년의 경우 방북 2일차 8시에 시작된 김 대통령 주최 만찬이 끝나기 직전인 자정 무렵에 서명이 이뤄졌고, 2007년에는 방북 마지막 날인 10월 4일 서명이 이뤄졌다.
  반면, 이번에는 두 번째 정상회담 후 합의내용을 담은 ‘9월 평양공동선언’에 남북의 정상이 서명을 한 뒤 송영무 국방장관과 노광철 인민무력상이 ‘판문점선언(4.27 남북정상회담 합의) 이행을 위한 군사 분야 합의서’에 서명하는 것을 지켜봤다. 정상 간 합의문서의 부속문서가 채택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합의서 서명식을 마친 두 정상은 10여분의 휴식 후 공동회견을 통해 합의내용을 발표했다. 4월 27일 판문점 우리 측 지역인 평화의 집에서 개최되었던 문재인-김정은 첫 정상회담과 같은 방식이다.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은 없었지만 북한 최고지도자 연설이 언론을 통해 전 세계로 생중계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는데, 이번에는 서울의 메인 프레스센터의 대형 모니터를 통해 생중계되었다.
  다섯째, 비핵화 문제가 핵심의제로 논의되고 비핵화 방안이 합의되었던 것은 처음이었다. 평양으로 출발하기 전에 문재인 대통령은 평양 방문으로 북미대화가 재개되면 그 자체가 큰 의미라고 말했는데, 평양정상회담에 대한 미국의 평가가 중요하지만 교착상태에 빠진 북미대화의 재개, 특히 두 번째 북미정상회담의 개최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이번 평양정상회담은 파격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방북 첫날 공항에서 백화원 영빈관으로 가는 길에 김정은 위원장과 함께 퍼레이드를 하고 도중에 내려 환영 나온 시민과 악수를 나누면서 대통령의 파격 행보는 시작됐다. 공동선언 서명 뒤 평양시민들이 즐겨 찾는다는 대동강 수산물시장에서 김정은 위원장 부부와 만찬을 한 문 대통령은 여기서도 평양시민과 악수하며 인사를 나눴다.
  특히, 밤에는 능라도 5.1 경기장에서 펼쳐진 대집단체조와 예술 공연을 관람하면서 분단 후 처음으로 한국 대통령이 15만 명의 평양시민을 상대로 연설을 하는 장면도 있었다. 문 대통령은 “우리는 5,000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서 살았다”며 “지난 70년 적대를 완전히 청산하고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한 평화의 큰 걸음을 내딛자”고 역설했다.
  이 연설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한 달 여 뒤인 1989년 12월 19일 처음으로 동독을 방문한 서독의 콜 총리가 드레스덴에서 한스 모드로 동독총리와 회담한 후 “헬무트! 헬무트!”를 연호하는 수만 명의 동독 시민들 앞에서 “역사적인 순간이 허용한다면 나의 목표가 통일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면서 “우리들은 계속 하나의 국가일 것”이라고 역설했던 연설을 방불케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9월 20일 아침 김정은 위원장과 함께 백두산에 올랐다가 귀국하는 것으로 평양정상회담 일정을 마쳤다. 이번에 합의된 ‘9월 평양공동선언’과 군사 분야의 부속합의서는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별보좌관이 지적한 대로 총론과 각론적 성격이 강했던 6.15 공동선언과 10.4 공동선언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적 성격이 강하다.
  또한 6.15 공동선언과 10.4 공동선언의 합의과정은 결코 순탄했다고 할 수 없었지만, 5개월도 채 안 되는 사이에 이뤄진 세 번의 정상회담은 남북관계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기 시작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한반도를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로운 터전으로 만들어 후손에게 물려주려는 ‘담대한 여정’의 앞길은 탄탄대로가 아니다.
  지난 4월 20일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천명한 대로 “전체 인민들에게 남부럽지 않은 유족하고 문명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부(負)의 유산과 결별해야 한다. 또한 올해 안에 북한 최고지도자로서 사상 처음 서울을 방문하기 위해서는 비핵화를 향한 북미대화가 조기에 재개되고 구체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는 과제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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