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땅의 유토피아- 양백지간 풍기
2. 땅의 유토피아- 양백지간 풍기
  • 금보리 논설기자
  • 승인 2018.10.04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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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평안·황해도 서북인들 십승지 찾아 풍기로 몰려와
인삼 인견의 발상지 풍기는 한국 근대산업의 서막을 열어

 

  아름다운 조국이라는 것을 단박에 느끼는 곳 중의 하나가 풍기 땅이다. 한국의 힐링처, 생명지촌(生命之村)을 찾아 나선 세번째 땅이다. 기자는 소백산 자락 노인봉 앞에 높다란 언덕(풍기읍 산법리, 대한광복단기념공원)에서 풍기 땅을 내려다보았다. 읍내를 엄마의 품처럼 포근히 껴안고 있는 소백산 연봉들의 인자함에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조선 중기 학자 남사고는 소백산을 사람을 살리는 '활인산(活人山)'이라고 말한바 있다. 그는 소백산을 지나가다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려 산을 향해 큰절을 했다고 한다.

풍기읍 금계리 앞에서 어버이날[사진=풍기읍사무소]
풍기읍 금계리 앞에서 어버이날[사진=풍기읍사무소]

 

 경북 영주시 풍기읍. 15세기에 기천의 기(基)와 은풍의 풍(豊)자를 따서 풍기(豊基)군이 되었으며, 1914년 일제 강점기에 전국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풍기군, 순흥군, 영(榮)천군 3개 군이 합쳐져서 현재의 영주가 되었다.

경상북도 북단에 위치한 풍기는 소백산맥이 서남쪽으로 뻗어 주봉인 비로봉(1,439m), 연화봉(1,394m), 도솔봉(1,315m), 묘적봉(1148m)으로 이어진 소백산 산록 고원이다. 죽령계곡에서 발원한 남원천과 비로사 계곡에서 발원한 금계천이 풍기읍 동부리에서 합류하여 서천을 이루다가 영주시내로 흘러들어 내성천이 된다.

정감록에 언급된 승지 가운데 풍기가 으뜸이라는 것에는 이설이 없다. 정감록촌은 금계리. 삼가리, 욱금리 일대를 말한다. 금계리는 노인봉과 공원산을 좌청룡 우백호로 두고 형성되었다. 넓은 성을 끼고 있는 공원산은 소백산의 기운을 품고 있는 산진처(山盡處)다. 금계리 가장 안쪽에는 용천골이 있고, 금계중학교, 풍기향교, 경북항공고등학교, 옛 풍기군 관아터였던 풍기초등학교가 차례로 자리 잡고 있다. 금계리 옆 백1리(희여골)에는 경남에서 이주한 창원 황씨들이 대대로 살고 있다. 풍기역을 지나 중앙선 남쪽으로 풍기 읍내가 펼쳐져 있다. 금계1리 임실마을에서 재밭마을까지 길가에 무궁화가 심어져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풍기에는 19세기 후반, 1890년대부터 6.25전쟁 때까지 평안도와 황해도 등에서 주민들이 많이 이주해왔다. 1960년대 풍기 인구의 삼분의 일이 이북(以北)출신이었다. 서북(西北)지방에 사는 황평(黃平·황해도와 평안도)인들은 정감록을 믿고 '양백(兩白·소백과 태백)'의 하나인 금계리를 찾아 왔다. 이때 이들이 들고 온 게 베틀과 인삼이었다. 베틀로 시작한 게 바로 그 유명한 풍기 인견이다.

조선시대 내내 서북인은 차별을 받았다. 16세기 황해도 도적떼의 괴수 임꺽정은 그렇게 불만이 많은 서북지역을 근거지로 했었다. 지벌(地閥)은 갑오경장에서도 조선의 적폐(積弊)로 규정했다. 그래서 서북인들은 본능적으로 살길을 찾아 나선 것이다. 파라오를 피해 가나안으로 출애굽한 유대인처럼 서북을 탈출해 남쪽으로 몰렸다. 풍기 읍내에 있는 정통 평양냉면집도 서북인들로부터 생겨났다. 지금은 실향 이북 2세들이 고향 맛을 보러 오는 곳 중의 하나가 되었다.

풍기는 인견과 인삼, 사과의 고장이다. 사양토이기 때문에 배수가 잘되어 인삼, 사과의 생육에 적절한 곳이다. 또한 일교차가 큰 지역으로 과실이 단단하다. 금계리 좌우로 마을을 감싸고 있는 야트막한 산들에는 사과나무 밭이 많다.

풍기 땅은 한국 인삼 재배의 시발지로 거론된다. 1541년 풍기군수로 온 주세붕(周世鵬)이 산삼의 씨앗을 가지고와서 직접 재배한 곳이라는것. 주세붕이 황해도 관찰사로 인삼 재배를 전파해서 개성 인삼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풍기 인삼은 여름철 보양에 탁월하다. 소백산록에서 자라 타지방 인삼보다 조직이 충실하고 유효사포닌 함량이 매우 높다고 한다.

풍기 인삼이 명품 브랜드로 자리 잡는 데에도 정감록을 믿고 내려온 서북인의 공이 컸다. 청나라와 가까운 개성, 해주 등지에서의 앞선 기술을 익힌 서북인들이 풍기로 내려와 정착하면서 경공업이 시작되었다. 풍기 산업의 뿌리는 1908년 '풍기삼포조합'이다. 풍기는 한국 상공업의 발상지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풍기인삼은 1910년 경북도지사 인가를 받았으며, 1919년 총독부 상표가 출원되었다. 풍기인삼조합 초대 이사장이 된 개성출신 구당 이풍환은 부친이 영양 현감(이종식)으로 재직할 때 풍기에 정착했다.

풍기에는 명주의 본고장인 평안도 영변, 덕천, 박천 등지에서 남하한 직물 장인들이 많았다. 그들은 명주실(누에고치에서 뽑은 실)과 비슷한 인견사(人絹絲)로 인견직물을 짜기 시작했다. 그런 연유로 풍기는 인견 공장 지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평안북도 박천에서 이주한 정감록 3세대 송진호(61세) 풍기 부읍장은 "차가운 감촉 때문에 일명 '에어컨 이불'이라고 불리는 풍기인견은 9년 연속 웰빙 인증을 받았으며 피부에 달라붙지 않고 땀 흡수와 발수가 빨라 여름철 인기품이다"라며 자랑했다. 예천 은풍의 부잣집 진성이씨 이규덕가의 머슴으로 일했던 박모씨는 풍기 직물공장에서 직물을 배워 대구와 구미로 가서 이화섬유 한국합섬이라는 공장을 차렸으며. 이후 80년대 한국 굴지의 섬유회사로 키웠다.

 “한국 인삼의 전문적 재배는 1890년대 금계리에서 황해도 출신 이주민에 의해 본격적으로 재배되었고, 견직(絹織)공업의 선진지인 평안도 출신 이주민에 의하여 풍기 인견산업이 결정적으로 이루어 졌다”고 최정규 경북항공고 교감은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대학원(지리교육전공) 석사 논문에서 썼다. 한국 근대산업에서 풍기의 중요성에 대해 말해주는 지적이다. 

금계리 서북쪽으로 도솔봉과 연화봉 사이에 험준한 죽령이 있다. 일명 대재(689m)라고도 불리는 죽령은 신라 초기(158년)에 길을 열었다. 156년에 개통한 문경의 계립령(하늘재)과 함께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백두대간 고갯길 중의 하나다. 경상도와 충청도(호서) 지방을 연결하는 경충(慶忠)요로였다. 1941년 일제가 죽령터널을 뚫어 중앙선을 개통하면서 죽령은 도로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조부 때 이주한 정감록파의 후손인 향토사연구원 김인순(72세)은 도솔봉이 독수리 형상의 산세라고 말한다. 도솔봉의 기를 받아 독수리처럼 멀리 보면서 결단할 때는 비호같으니 이 지역에 성공한 인물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바람골인 죽령에서 불어오는 북풍도 사람의 인성을 단단하게 했을 것이다. 돌·바람·여자가 많은 삼다(三多)의 고장 제주도처럼 풍기도 바람이 거세다. 그만큼 풍기인들의 생활력이 강인하다고 한다. 비밀결사 독립운동단체인 대한광복단이 1913년 풍기에서 최초로 결성된 것도 충의로운 풍기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풍기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인 금계리 출신 김계원의 이야기가 자주 회자된다. 그의 조모 이정연은 평양에 살 때 친정이 운영했던 한의원의 행랑채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그녀 덕분에 1909년 초옥 12칸으로 풍기교회 예배당을 근사하게 지었으며, 풍기인들이 일찍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김계원의 종조부(김창립)가 영신학원을, 김계원의 부친(김길준)은 풍기고등학교(현 경북항공고)를 설립했다. 풍기 성내동 출신인 강경식은 재무장관과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으며 부산에서 3선 국회의원을 한 뒤 김영삼 정부에서 경제부총리를 역임하였다.

풍기는 영주시내로 가는 길 빼고 삼방이 막혀있으나, 서남쪽으로 보일 듯 말 듯 트인 좁고 긴 골짜기가 있다. 그 골짜기는 봉현면 천부산과 용암산(자라봉) 사이로 난 고개(힛티재)를 지나 예천 감천까지 50리에 달한다. 부석-단산-순흥-풍기-봉현-감천(예천)을 지나가는 국도 931번이 통과한다.

 소백산은 산(山)이라는 사물이라기보다는 유달리 격이 유달리 격이 우러나는 생명으로 경외를 느끼게 해준다. 정물(無情物)에 유정심(有情心)이라고나 할까.

20대 시절, 노산 이은상의 '산 찾아 물 따라'에서 선뜻 감응을 느끼지 못한 구문이 있었다.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조국의 강산이다"라는 구절이다. 나이 마흔이 넘어서야 이것을 이해하게 되었으니 나도 꽤 우둔한 사람이다.

풍기는 십승지이자 소백산이 준 위대한 선물이다. 소백산은 중력처럼 사람을 끈다. 소백산과 풍기 땅이 주는 보살핌과 자람(生長)은 천지의 조화로 그 위대함을 말로 다 형용할 수가 없다. 와서 보면 저마다 감흥(感興)이 다를 것이다.

*주

1)남사고: 조선 중기 학자. 고향 울진의 불영사에서 신승을 만나 비결을 전수받고 전국 각처의 명산을 돌아다니며 수련한 끝에 천문, 역학, 관상, 복서의 비결에 뛰어났다고 전한다.

2)정감록: 조선 중기 이후 민간에 널리 퍼진 예언서. 실존 여부를 알 수 없는 이심(李沁)과 정감(鄭鑑)의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풍수 사상과 도참 신앙이 합쳐져 이루어진 난해한 책으로, 국가 운명과 생민 존망(生民存亡)에 대한 판단을 담고 있다.

3)풍기 폐군 100년을 맞아 영주문화원에서 발간한 <풍기군의 역사와 문화>을 저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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