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국 항일 의병장으로 순국한 「의병대장, 장윤덕」출간
구한국 항일 의병장으로 순국한 「의병대장, 장윤덕」출간
  • 박덕근 기자
  • 승인 2019.07.07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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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오적 처단 시도하다 실패하자 낙향 의병활동
일군과 교전하다 체포돼 총살형...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성희역사문화문고’는 구(舊)한국 시대 경북지역 청년 의병장인 성암(惺菴) 장윤덕(張胤德1872∼1907) 의사 평전격인 「의병대장, 장윤덕」을 최근 펴냈다. 장의사는 경상북도가 지난 2012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바 있다.

장 의사는 1907년 4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해 서울로 들어갔으나 배신자의 밀고로 실패, 낙향해 후일을 도모했다.

경북대학교 교정에 있는 장윤덕의사기념비
경북대학교 교정에 있는 장윤덕의사 순국기념비

 

1907년 7월 성암은 격문을 각지에 발송하고 3백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의병진을 편성, 영춘의 이강년 의병과 합세하여 의병운동을 지휘했다. 주로 풍기 봉화 문경 용궁 예천 등 경북지역에서 활동하였다.

1907년 7월 9일에는 일본경찰대와 교전하여 일본인 보조원 3명과 한인 순검 2명을 사살하였고, 8월 27일 의병 3백여 명을 인솔하고 풍기 일경분파소를 습격하여 1명을 사살하고 31일에는 봉화분파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불태웠다.

1907년 9월 3일 문경읍을 공격하여 일본인 2명을 사살하고 일본인의 가옥을 불태웠으며, 10일에는 이강년, 민긍호 등의 의진과 합세하여 1천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문경 갈평리에서 일경 나가타니(永谷) 경시(警視)와 미하라(三原) 소위가 인솔한 경찰대 및 수비대와 격전하여 일본군 3명과 한인 순검 2명을 사살하고 적을 격퇴시켰다.

9월 12일, 예천읍 공격에 이어 3백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상주읍을 공격하여 일본인 자위단과 교전하던 중, 대구수비대에서 출동한 다나카(田中) 대위의 1개 중대와 격전을 벌였으나 패하면서 성암은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성암은 “내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의거하여 강도 너희 놈들을 몰아내지 못하고 붙잡혔으니 오직 죽음을 바랄 뿐”이라며 “너희 놈들과는 아무 말도 하기 싫다”고 하여 일경을 크게 꾸짖고, 갖은 악형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앞니로 혀를 끊어 끝내 함구로 저항하다 1907년 9월 16일 함창 구향리(현 상주시) 뒷산에서 총살됐다. 당시 35세 청년이었다.

성암의 본관은 단양 장씨이며, 1872년 예천읍 노상리에서 양반 가문 장재안(張載安)의 장남으로 태어나 한학(漢學)을 배우고 예천 보문사에서 공부했으며, 예천군 수서기(首書記)이던 1905년 12월,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상실될 위기에 이르자 사직하고, 항일 구국의 길로 나섰다.

성암이 순국 한 후 일본군 수비대가 성암의 집을 불태우는 등 탄압이 극심해지자, 장의사의 부인 함녕김씨는 어린 아들 시환(時煥)과 인환(寅煥)을 데리고 낮에는 예천군 보문면 수계리 산속 토굴에서 지내고 밤에는 논 밭으로 다니며 보리와 벼이삭으로 연명하였다는 이 지방의 살아있는 전설로 전해오고 있다.

장윤덕 의사 기념사업회가 1967년 9월 16일 장윤덕 의병장 서거 60주년을 맞이하여 예천군 보문면 수계리 묘지에 세운 묘비 전면에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쓴 ‘義兵大將惺菴張胤德先生之墓(의병대장 성암 장윤덕 선생지묘)’라 적혀있다. 김인(金仁) 경상북도지사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에는 `사직(社稷)이 무너질 제 일천년 의병 몰아/ 왜적을 무찔다가 의혈(義血) 뿌리시니/ 의혈(義血) 영켜 반석(盤石) 되고 반석(盤石) 위에 나라 섰네./ 이제사 비 바람친다 쓰러지리,/ 임이여! 원한(怨恨)의 두 눈 감으옵소서.'라고 적혀있다.

광복 20주년이 되던 1965년 10월 30일 장윤덕의사기념사업회가 대구시 북구 산격동 경북대학교 캠퍼스 안에 ‘장윤덕의사순국기념비(張胤德義士殉國紀念碑)’를 세웠다. 배학보가 짓고 최원봉이 쓴 기념비문에는 ‘조국이 광복된 지 스무 해 되는 오늘 나라의 기둥 될 준재들이 모인 이곳 경북대학교 뜰에 드높이 돌을 세우고 의로운 사적을 새겨 이 땅의 젊은 학도들에게 길이 전하니 후진들은 명심할지어다.’ 라는 글귀가 새겨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대통령표창,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한편 장의사의 주손인 장국현 한화포리마 사장과 장익현 변호사가 증손자이고, 장기웅 전 재(在)대구예천군민회장이 손자다. 장 변호사는 대구변호사회장,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이사장, 국제로터리 3700 지구 총재, 대통령소속 사회통합위원회 위원, 사립대학재단 이사장을 지내며 다방면의 사회운동과 봉사를 한 대표적인 지역 인사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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