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잃어도 민족교육 지키자", 경북 最古 민족사학 ‘대창중·고’ 100주년 맞아
"나라 잃어도 민족교육 지키자", 경북 最古 민족사학 ‘대창중·고’ 100주년 맞아
  • 박덕근 기자
  • 승인 2022.02.02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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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독립운동가 권준홍 설립 대표, 反日 인사 장봉환 학원장 등이 대창학원 세워

3.1운동 이후 민초들의 종잣돈으로 경북북부 유지들이 1922년 민간운동으로 설립.

일제 탄압 생존한 중등 민족사학으론 대륜학교와 함께 대구·경북에서 가장 오래돼

유근영 권영달 송홍근 교사, 비밀히 민족주의적 애국 의식 고취로 교육구국 실천

독립운동 구국정신으로 설립한 대창중·고등학교가 올해로 개교 100주년을 맞아 전통 민족사학으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3.1운동 이후 1922년 민족교육, 교육구국 정신을 내걸고 민립(民立)으로 개교해 일제 탄압과 격동의 근대사를 딛고 현재까지 중단 없이 이어져오고 있다.

 

민족교육입국을 내세운 선각자들이 대창학원을 개교한지 올해로 100주년을 맞았다. 1927년 옛 조선시대 예천군 객관을 이건해 교사로 쓰고 있다.
1922년 설립한 대창학원이 1927년 옛 조선시대 예천군 객관을 이건해 교사로 쓰고 있다.

 

대창중·고는 일제 강점기 예천청년회 등 경북북부지역 독지가와 민간인들의 기부금으로 1922215일 예천읍 뒷산인 송대(松臺) 언덕에 대창학원으로 개교, 보통과와 고등과(高普) 과정으로 열었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3.1운동이후 인재양성 국권회복의 민족교육 운동이 전개될 때 개교 된 학교 중에 오늘까지 남아있는 학교는 경북에서는 유일하다100년 전통의 중등 사학은 대구에서 대륜학교 전신인 교남학원이 19219월에 개교했고, 김천고보가 1931년 설립됐다. 이외 중등 공립학교로는 대구고보가 1916, 안동농림학교가 1933년 개교됐으며, 미국 기독교 선교사들이 세운 미션스쿨로는 1906년 계성학교 1907년 신명여중이 설립됐다.

대창학원의 개학식은 1922년 2월 15일 예천향교에서 개최됐는데, 예천청년회를 대표해 회장 권준흥이 식사(式辭)를 하고 첫 교실은 다산 정약용이 공부한(다산시문집) 예천향교의 명륜당이었다.(동아일보 1922년 2월 25일자 보도)

대창학원 설립 대표자 권준흥(權準興 1881〜1939)은 권오설을 낳은 안동권씨 세거지 안동 풍천면 가일 출신으로 대한제국 혜민원 주사를 지내고 항일 투쟁을 한 독립운동가. 초대 대창학원장 장봉환(1868〜1929)은 주미공사관 서기관, 대한제국 군악대 창설 후 시위연대(고종 경호실) 대대장을 하던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한 일제에 의해 대구진위대장(경상도 관할)으로 좌천됐고, 고종의 밀명을 심상훈을 통해 받아 안동 예천 영주를 다니며 의병 봉기를 도모하다가 일본에 의해 1906년 해임된 반일(反日)인사다. 일본 고등경찰은 그를 헌병대와 협의해 검거하려 했음이 일본측 기밀자료에 의해 최근 밝혀지기도 했다.

장봉환 초대 대창학원장은 대한제국 시위연대(고종 경호실) 대대장을 하던 중 190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한 을사조약 이후 대구진위대장으로 좌천돼 의병봉기를 도모하다가 일경에 의해 보직 해임된 반일(反日)인사다
장봉환 초대 대창학원장. 을사늑약 이후 대구진위대장으로 좌천돼 의병봉기를 도모하다가 해임된 반일(反日)인사다

 

대창학원 설립 기금 모금운동도 이채롭다. 3.1운동 직후 조직된 민족의식을 지닌 예천청년회가 앞장섰지만, 벽천 김석희를 비롯한 예천 등 북북경북지역 독지가와 민초들이 낸 기부금 2천여원이 종잣돈이 됐다.

설립 전해인 1921년 9월 예천청년회원들이 학교 설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만든 소인극단(素人劇團)이 각 면지역을 순회, 「춘몽(春夢)」을 공연했는데, 예천면(현 예천읍)에서 800여명의 관람객이 운집해 상주에서 온 허 여사가 4원을 기부하는 등 총 33원(円)이 모금됐다.(조선일보 1921년 9월 21일자 보도) 「춘몽」은 양반과 선비의 위선을 풍자한 구한국 고전 소설이다.

당시 나라를 잃고 가난과 배고픔에 지친 민초들이 배워야 된다는 민족적 자각과 함께 대창학원의 설립은 당시 새로운 희망이었다. 일제가 만든 보통학교에 입학하지 않았거나 대구고보나 경성(서울)으로 유학하지 못했던 예천 안동 문경 의성 영주 등 경북북부지역 학생 150여 명이 대창학원으로 몰려들었다. 이번 100년사에 게재될 대창학원 제1회 졸업생 현석호 전 내무장관의 회고에 의하면 장가들고 갓 쓴 30대 어른에서부터 7,8세 어린 학생까지 함께 공부하는 진기한 풍경이 벌어졌다는 것.

당시 대표적인 일간지 매일신보(경성 소재)

이후 일제 탄압과 방해로 대창학원이 운영난을 겪게 되자 당시 청년회장이던 김석희 외 4인이 1925년 학교운영권을 공동 인수하고 김석희 회장은 학원장으로 취임하였다. 1927년에는 조선시대 예천군 객관을 현재 대창중고 자리로 이건해 새로운 교실로 사용했다.

벽천 김석희
벽천 김석희

 

대창학원은 민족주의 교사들의 활약상으로 유명하다. 경기도 출신으로 경성고보 재학 중 3.1만세운동으로 체포되었다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예천 대창학원으로 온 독립유공자 유근영(18971949)은 일경의 감시를 피해가며 학생들에게 국학(역사와 문화)을 은밀하게 가르쳤다.

한글학자요 언어민족주의자로 경성고상(서울대상대 전신)출신인 권영달(19271945) 선생은 권준흥 회장의 아들로 1927년부터 1942년 까지 대창학원 교사로 도서실 바닥에 엎드려 몰래 한글을 가르쳤다

풍기의 독립운동가 아들로 태어난 송홍근(19142003)은 대창학원을 졸업하고 도일 유학 후 귀국하여 모교 대창학원에서 한국의 역사와 말과 글을 가르쳤다. 이들은 모두 일제의 모진 탄압을 무릅쓰고 비밀리에 우리 민족문화를 가르치고 반일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등 민족교육을 계속하여 대창학원이 민족교육의 요람으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학원장 김석희 선생은 교사와 학생들을 지원하고 일제의 탄압을 온몸으로 막아서며 이들을 보호해 대창학원이 민족교육의 요람으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언어민족주의자 대창학원 교사 권영달
언어민족주의자 대창학원 교사 권영달

 

대창학교 동문들은 개교100주년 기념사업회(회장 정용인 전 대전고등법원장)를 결성, '민족교육의 요람, 대창중고등학교개교100년사' 편찬(편찬위원장 김봉균), 역사자료 수집 전시 등 각종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100년사에는 1924년 대창학원 1회 졸업생 권동하(2공화국 경북도의회 부의장), 8대 조계종 서암(西庵) 종정의 유고와 이수창 삼성생명회장, 세계해외한인무역인협회장을 지낸 권병하 말레이시아 기업인, 이상연 전 재경경북도민회장, 김종창 전 금융감독원장, 한국경제학회장을 지낸 김정식 연세대 상대학장, 트랙스타 권동칠 대표, 장해랑 EBS사장, 하이델베르크대학 철학박사 출신 김윤구 명지대 교수 등 동문의 애틋한 추억이 서린 글이 게재된다.

1회 졸업생 현석호 주중 외교관 지내고 해방후 이승만 3선반대, 5,16쿠데타 반대등 영욕의 현대사 주인공

대창학원 1회 졸업생 현석호는 경성제대 법학과 재학 중 일본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화순군수 황해도과장을 거쳐 중국주재 외교관을 다년간 지내고 귀국, 충남도에서 근무하다 9개월 만에 해방이 돼 미군정이 관직을 요청하자 일제 관리를 10년 지낸자로서 도의적 책임을 진다며 사직하고 귀향했다(‘경향잡지). 이후 정계로 진출해 3대 국회의원 도중 이승만의 3선을 위한 사사오입개헌에 반대해 자유당을 탈당했다. 4.19혁명 이후 민주당에 영입돼 5대 의원 시절 장면정부에서 내무장관을 거쳐 국방장관을 하던 중 5.16쿠데타를 만나 윤보선 대통령이 승인한 쿠데타를 끝내 반대했으며 국무총리 제안까지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대창중고등학교
현재 대창중고등학교. 사진 대창고등학교 제공

 

벽천 김석희(18851950)가 대창학원장 역임 후 대창중학교장에 재직 중 6.25사변 통에 순직하자 뒤를 이어 메이지대 출신 김교용이 1950년 대창중 교장, 53년 대창중고 교장을 맡아 1996년 국문학자 정양수에게 교장을 인계하기 전 까지 46년 간 인재 양성에 전생애를 던진 교육계의 전설이고 표상이다. 평생 자가용도 없이 겨울엔 학생들의 도시락을 따뜻하게 난로에 데워 주며 공화당 공천 영입도 거절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송원 김교용
송원 김교용

 

"민족을 밝힌 100년, 미래를 이끌 100년"의 비전으로 '민족교육요람 대창 100년사' 편찬, 기념관 등 추진

대창학원(47년 대창공민중학교 개명)은 총26회 졸업생 2,362(여자148명 포함)을 배출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49년 대창중학교로, 53년 봄 대창고등학교로 각각 다시 출발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올해 2월 대창고등학교 67명이 졸업하는 등 정부수립 이후에만 총 제67회 모두 12,388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후 농촌의 쇠락으로 학생 수가 급감해 현재 대창고는 12개반 214, 대창중은 6개반 130명이다. 정부의 근세문화유산, 민족사학 보존 계승을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 대창학원은 해방이후 김석희 교장을 도와 초대 박철구 이사장, 김경한 교감 등이 대창중학교 설립과 재단법인 설립인가를 받아오는 등 개교 공신들이 있다. 재단 이사장은 서울대법대 출신으로 대창고 교사, 안동상공회의소회장을 지낸 조동휘, 김교용에 이어 현재는 서울대 상대를 나와 글로벌 기업 Nalco Korea 부사장을 지낸 김경호가 맡아 민족을 밝힌 100, 미래를 이끌 100의 비전으로 뛰고 있다. 김 이사장은 "나라는 잃어도 민족을 교육으로 지켜온 전통을 이어 글로벌 인재를 양성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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