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과 카투사
6.25전쟁과 카투사
  • 류영봉
  • 승인 2022.09.03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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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8월 학교 가다가 강제로 군 트럭에 태워져 징집
인천상륙작전부터 장진호 전투까지 한국최초의 카투사의 전투기록

6.25전쟁은 국가나 개인 모두에게 비극적인 사건이다. 전쟁 시기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에겐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필자는 6.25전쟁을 직접 참전하면서 전쟁이 개개인에게 얼마나 참혹함을 가져다주는지를 경험했다. 전쟁은 우리 가족의 모든 것을 한순간에 모든 앗아 가버렸다. 전투에서 둘째 형 부상당했고 셋째 형은 전사했다. 당시 18세였던 나는 강제 징집되어 전쟁에 참전했다.

그리니까 다부동지역 전투가 한창인 816일이다. 평소와 다름없이 학교에 가다가 경찰에 의해 강제로 군 트럭에 태워졌다. 가족들에게 군에 간다는 이야기 할 틈도 없이 징집을 당한 것이다.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다. 당시 길을 지나가던 학생들과 청년들은 거의 자의반 타의반으로 트럭을 탔다.

그 가운데 일부는 카투사가 되었다. 전쟁 기간 중에 징집되어 카투사가 된 것이다. 한국 최초의 카투사가 이렇게 등장했다. 지금이야 카투사가 어떤 임무를 수행하는지를 알지만, 당시에는 카투사라는 말 자체가 생소했다. 카투사제도는 6.25전쟁 중이던 19507월에 이승만 대통령과 미군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협의했고, 815일부터 카투사를 징집했다. 북한군이 점령하지 못한 부산,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시작된 것이다. 필자가 16일에 징집되었으니까 거의 첫 번째 대상이었다.

대구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이동하는 과정에 우리는 유엔군에 소속되고 일본으로 교육받으로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징집된 인력은 일본 요코하마에 내려서 후지산 부근에 있는 유엔군 소속 미육군 제7사단 캠프에 합류했다. 당시 캠프에 합류한 대원 중 100여명은 7사단 제17연대 의무중대로 배속을 받았다.

지금이야 영어가 생활화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영어는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 알고 있을 정도였다. 영어를 조금 알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회화보다는 책을 읽는데 익숙한 경우가 많았다. 우리들 대부분이 영어와는 거리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도착 후 다음 날 나온 군번에는 영어로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군번을 받아들고 다들 놀랐는지 수군거리기까지 했다. 그만큼 당시 영어는 생소하면서도 어려운 것이었다. 다들 익숙지 않은 영어를 미군 교관으로부터 들어면서 훈련이 시작되었다. 교관들의 구령조차 알아듣지 못하고 우리는 우왕좌왕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조교가 되었다. 조교는 영어를 어느 정도 해야 했다. 대학졸업자, 교사, 대학생 등이 있었지만 교관의 영어를 알아듣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교관들의 입장에서는 훈련을 하자면,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찾아야 했는데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옆의 앉은 친구가 나를 추천했다. 앞으로 영어가 중요할 것이라는 맏형의 이야기를 듣고 영어사전을 늘상 품고 다닌 것을 이 친구가 본 것이다. 교관은 기본적인 회화 몇 마디로 훈련생 일부를 테스트했고 몇몇을 조교로 선발했다. 물론 아주 소수이기는 하지만 영어가 능통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다른 부대로 배속되었다.

조교는 교관들과 훈련생을 이어주는 전령 역할이었다. 조교의 역할이 힘들었다. 교관의 지시를 다 알아듣기 힘든 부문도 있었다. 그래도 훈련을 받으면서 서로 전우애가 형성되고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조금씩 가지기 시작했다. 낙오자 없이 약 2주간 훈련을 마치고 부산항에 도착했다. 카투사 1기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부산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했다. 유엔군의 일원으로 첫 번째 전쟁참여였다. 의무부대에 속해 있어서 주로 부상병치료를 전담했다. 이후 6.25전쟁의 대부분 전선에 참여하면서 카튜사 의무를 수행했다.

류영봉(카투사 1기, 미국 적십자사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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