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경험한 장전호전투와 흥남철수
내가 경험한 장전호전투와 흥남철수
  • 류영봉
  • 승인 2022.09.18 10: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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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눈앞에 두고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후퇴하면서 일어난 비극

6.25전쟁에서 장전호전투와 흥남철수는 가장 안타까운 사건이다. 통일을 눈앞에 두고 후퇴과정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경험은 평생 잊을 수 없다. 그 기억을 다시 되새겨 본다.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 후 대구지역에서 극적으로 어머니를 상봉하고 다시 부산으로 향했다. 부산에서 함경남도 이원군으로 이동했다. 북청군, 산수군, 갑산군을 거쳐 혜산진까지 진격하자 인민군들이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통해 달아나는 모습을 목격했다. 이때가 1125일이었다. 이제 통일이 되겠구나하고 생각했다. 미군들조차도 빨리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면서 좋아했다. 미군과 우리 카투사들이 서로 얼싸 앉고 기뻐했다.

기쁨은 잠시였다. 26일부터 중공군이 대규모 침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필자가 소속된 미 7사단이 혜산진 부근에서 중공군에 포위당했다. 하루 만에 정세가 바뀐 것이다. 혜산진 주민들의 도움으로 겨우 탈출을 했다. 장진호 부근으로 남하를 했었는데, 이미 중공군이 포위하고 있었다. 장진호는 산으로 둘려 쌓여 있고 기온은 영하 30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장진호 주변에서 우리부대와 중공군은 약 2주간 치열한 전투를 했었다. 우리는 지원부대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중공군은 그 추운 겨울에도 꼼작도 않고 매복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우리를 공격했다. 첩첩 산중에서 매서운 추위, 쏟아지는 눈과도 싸워야 하는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민가를 발견했다. 주민들이 피난에 나서서 빈집이었다.

이야기가 약간 벗어나는 것 같지만 당시에 머물렀던 빈집에 대해서 조금 언급하고자 한다. 당시 너무 춥고 힘들었던 상황이라 기억이 아직 또렷하게 남아있다. 집은 담장도 없고 사람과 가축이 한 지붕 안에서 사는 구조였는데, 출입문은 부엌문을 이용했다. 다락이 있었는데, 주로 감자, 옥수수, 곡물을 보관하고 있었다. 중공군에게 알려질까 봐, 집에 불을 피우지 못했다. 그래도 미군들에게 지급했던 판초와 닭 털 침낭은 추위를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 결국 미 해병7사단의 도움으로 탈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군의 부상자는 물론이고 동상환자도 많아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탈출해서 함흥시 인근에 왔는데 병력이 거의 절반으로 줄어든 것 같았다. 장진호 전투는 그만큼 치열했다. 함흥시는 당시 시장이 형성되어 물건 거래가 이루어질 정도로 평온했다. 장진호 지역과 너무 달라 의아했을 정도다. 함흥에서 우리는 흥남으로 이동했다. 흥남으로 가서 피난민 철수를 도우라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소문을 듣고 왔는지 피난민들은 인산인해였다. 10만 피난민들의 대수송작전이 펼쳐지는 현장도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그래도 미 제10군단 알몬드(Edward M. Almond)소장이 군함에 적재했던 큰 무기들을 내려놓고 피난민들을 태우기 시작하면서 어느 정도 숨통을 틔었다. 알몬드 장군은 마지막 피난민이 탄 전차상륙함(LST)이 출발하자 흥남부두에 내려놓았던 무기와 함께 흥남부두를 폭파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진동. 천지를 붉게 물들게 한 흥남부두를 뒤로한 채, 우리 부산으로 출발했다.

돌이켜 생각하면 전차상륙함에 피난민들이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모습, 태워 달라고 아우성치는 모습을 보고도 떠나 온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그 때 군함을 타지 못한 분들이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지금까지 생존해 있을지를 생각하면 눈물이 아른거린다.

장진호전투에서 사망한 전우들, 흥남철수 때 마지막 전차상륙함인 빅토리아호를 타기 위해 몸부림치던 사람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전쟁이 그들의 삶을 짓밟아 놓은 것이다. 두 번 다시 이런 비극이 한반도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류영봉(카투사 1기, 미국 적십자사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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