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카투사가 6.25전쟁 중에 받은 마지막 휴가
최초의 카투사가 6.25전쟁 중에 받은 마지막 휴가
  • 류영봉
  • 승인 2022.10.07 07: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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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에 복귀해서 전사한 네 형의 몫까지 다하고 와야 한다"는 어머니의 귀대 명령

정전회담이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전투는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한국군 5사단과 필자가 소속된 미7사단 17연대는 가칠봉 전투에 투입되었다. 가칠봉은 강원도 인제로 진격하는 요충지였는데, 이미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이 가칠봉을 빼앗기 위한 전투가 19519월에서 10월 초까지 약 40일 가까이 진행되었다.

이 전투에서 우리 부대는 승리한 공로로 후방으로 이동됐다. 거제로 가서 포로수용소의 경비임무를 담당했다. 이 시기가 전쟁 기간 중 그나마 편안한 시간이었다. 이런 와중에 어머니로부터 편지가 왔다. 그때가 19525월 초였다. 편지에는 셋째 형이 전사했다는 통지와 둘째 형이 부상당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당시 군위관 폴(Garcia Paul)대위에게 사정을 설명했더니 10일간의 휴가를 주었다.

문제는 고향까지 갈 경비가 없다는 것이다. 고맙게도 이를 눈치 챈 미군들이 위로금을 모아준 것이다. 그때 정말 고마웠다. 사실, 전쟁 중에 돈이 있어도 쓸 곳이 없었다. 그래서 돈에 대한 생각 없이 군복무만 했다. 그런데 막상 휴가를 가게 되면서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우리 전투의무병들은 미군에서 월급을 주었다. 월급이 달러로 나오다보니 그걸 몽땅 한국 정부에서 받아 챙긴 것이다.

전쟁 와중에 이렇게 해서 휴가를 나왔다.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는 망연자실 그 자체였다. 자식을 잃은 부모가 정상으로 계셨다면 그게 비정상일 것이다. 군에서는 셋째 형의 전사통지서만 보내고 시신수습에 대해서는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둘째 형은 육군 제7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당시 밀양국민학교를 제7병원으로 사용한 것 같다. 집에 머물면서 어머니를 위로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할 것이 없었다.

귀대 시간은 다가왔다. 어머니를 보니 귀대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귀대 하루 전 어렵게 부대에 돌아가지 않고 집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어머니에게 밝혔다. 그런데 어머니가 의외의 말씀을 하셨다. 군에 복귀해서 전사한 네 형의 몫까지 다하고 와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이 전쟁이 어젠 끝날지 모르지만,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시겠다는 것이다. 한 자식이 전사하고 또 한 자식은 불구자가 되어 병원에 있고 또 한 자식은 다시 군에 가야 하는 참담한 현실 앞에 당신은 담담하게 자식이 귀대하기를 요구했다. 과연 이 상황에서 자식을 다시 군에 가야 한다고 이야기를 할 어머니가 과연 얼마나 계실까?

지금 생각해봐도 선 듯 답이 나오지 않는다. 어머니의 애국심일까? 아니면 자식의 장래를 위한 부모의 심정일까? 아니면 모든 것을 체념하고 주어진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이었을까? 어느 하나라고 명쾌하게 답을 할 수 없다. 그래도 한마디 해야 한다면 여성은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로 답을 대신하고 싶다.

우여곡절 끝에 부대로 복귀했다. 그것이 군에 입대해서 나온 첫 번째 휴가이자 마지막 휴가였다. 전쟁은 지속되었다. 귀대하자마자 우리 부대는 중부전선으로 이동했다. 인제, 양구, 김하까지 진격했고 김일성고지까지 점령했다. 철원평야를 장악하고 북한 노동당사에서 며칠간 보내기도 했다. 남북 모두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얻기 위해 정말 치열했다. 백마고지 전투, 폭 찹 힐(pork chop hill) 전투 등 1952년 말부터 휴전 직전까지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대부분의 전투에 참가했다.

이렇게 전투에 참여하면서도 휴가 중 어머니의 네 형 몫까지 다하고 오라는 말씀을 마음속에 품어가면서 6.25전쟁 끝나는 순간까지 대한민국을 지켰다.

류영봉(카투사 1기, 미국 적십자사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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