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패 출신 예술가 박용주의 마지막 그림
깡패 출신 예술가 박용주의 마지막 그림
  • 언론인 구활
  • 승인 2022.10.26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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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 프로 레슬러를 역 플랫폼으로 업어치기로 때려 눕혀
메이지대에서 4단 짜리 일본 학생들 차례로 꺾고 즉석에서 4단 승단

박용주 선생은 예술가다. 그림도 그리고 시도 짓고. 내 주위에서 그만한 예술적 센스를 지니고 있는 이를 만나기가 정말 흔치 않다. 선생은 요즘 말로 ‘조폭’이나 ‘깡패’에 해당하는 한국 일본 중국 등 동양 3국을 누비고 다닌 ‘어깨’ 출신이다. 그런 그가 ‘예술’이라는 아름다운 격랑 속으로 빨려들어 죽을 때까지 헤어나지 못했으니 신기하기만 하다.

선생은 1915년 2월 7일 생으로 1988년 5월 7일에 졸하셨다. 일흔 넷의 일기를 풍운아로 사신 분이다. 어깨 출신들의 생이 흔히 그렇듯 선생도 젊은 한 시절에는 주먹 하나로 돈과 여자를 제 마음대로 했지만 늙으막에는 혹독한 가난과 싸우면서 외롭고 쓸쓸한 나날을 보내다 하늘나라로 올라 가셨다.

선생이 살아오신 생애 전체가 소설이자 드라마다. 살아 계실 때 몇 번이나 당신의 일생을 구술해 주시면 ‘깡패 시인 박용주 평전’을 써보겠다고 몇 번 간청했지만 번번이 “부끄러운 일들을 들추면 뭘 해”하시며 거절하셨다. 지난핸가? 고 신도환 선생이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유도 10단으로 승단했다고 떠들썩했는데 선생은 한단 못 미친 9단이다. 유도9단의 어깨가 시인으로, 또 춘화를 절묘하게 그리는 화가로 일가를 이뤘으니 불꽃같이 활활 타다 간 생애가 바로 선생의 일생이었다.

선생은 바람이었다. 언론인인 김병식 선생이 전하는 젊은 날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혼자서 선생을 당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상체가 발달한 선생은 태양인으로 원래 예인의 기질을 타고나신 분이다. 출입문 외에는 도망갈 곳이 없는 주점에서 패거리 깡패들과 싸움이 붙어도 선생은 앉은자리에서 덕수를 넘어 칼을 들고 달려드는 상대를 순식간에 제압하고 창문으로 도망치는 신통력을 가졌다고 했다. 작가 이봉구 선생이 쓴 ‘명동“이란 단행본에도 선생이 명동에서 활약하던 장면이 두어 군데 나오는 걸 보면 선생의 명성은 짐작할 만 하다.

선생과 구상 시인이 언제부터 교우하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느 날 이름자 뒤에 붙는 명칭을 서로 바꾸기로 했다고 한다. 그날부터 두 분은 만나면 ‘용주 시인‘과 ’구상 깡패‘로 바꿔 불렀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선생의 시 ’볼‘인가 ’빰‘인가가 세대지에 실리는 영광을 얻었고, ’화가‘라는 칭호 외에 ’시인‘이라는 빛나는 관을 선생의 머리 위에 얹게 되었다.

선생의 주먹 얘기를 해볼까. 대구 교남학교에서 서울의 중동학교로 적을 옮긴 선생은 유도부 주장이 되었다. 나중 서울대 초대 총장이 된 최규동 선생이 교장이었다. 최 교장은 선생의 재능을 높이 사 친구인 가와모도 유지로(川本柳又郞)에게 소개장을 써주며 일본으로 보냈다. 그러나 가와모도는 선생의 지나치게 센 기를 꺾기 위해 3개월이 지나도록 대학 진학을 도와주지 않았다. 선생은 어느 날 밤 가와모도 집의 담을 넘어 들어가 품고 간 칼을 다다미에 꽂고 항의했다. 가와모도는 선생의 대담성을 높이 사 명치대 상과로 보내 주었다.

공부에는 별 취미가 없었던 선생은 유도복을 들고 명치대 도장으로 갔다. 사범의 주선으로 3단인 선생은 4단 짜리 일본 학생들과 차례로 대련, 모두 꺾고 즉석에서 4단으로 승단했다. 선생의 명성은 삽시에 캠퍼스로 퍼져 나갔다. 특히 한국 학생을 조롱하는 일본인은 그냥 두지 않았다. 일본학생들에겐 공포였으며 한국 유학생에겐 큰 위안이었다.

선생은 일제의 징용을 피하기 위해 호적을 빼내 가방 속에 넣고 다녔다. 중국으로 건너간 선생은 천진에서 북경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체중 36관 짜리 이태리인 프로 레슬러를 만났다. 레슬러는 두 사람이 앉아야 할 좌석을 독차지하여 비켜 주지 않았다. 선생은 30초 정거하는 다음 역 플랫폼으로 레슬러를 불러내 업어치기 한판으로 때려 눕혀버렸다. 열차는 떠났고 빈자리에는 레슬러의 보스톤 백만 북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백 속에는 독일의 자존심이라 부르는 라이카 카메라가 들어 있었다. 선생은 선술집에 앉아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라이카 카메라를 둘러매고 다닌 사람은 바로 박용주야”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70년대 초반, 선생은 스케치북을 몸에 지니고 다니셨다. 다방에서나, 막걸리 집에서나 신명나면 춘화를 그렸다. 그린 춘화는 마음에 드는 후학들에게 나눠주었다. 춘화는 주로 연필로 그렸다. 발가벗은 승려가 남근에 염주를 걸고 여성을 희롱하는 그림도 그렸고, 가톨릭의 주교급 성직자를 춘화 속으로 끌어들여 알몸 유희를 벌이게 한 그림들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별로 힘들이지 않고 그리는 춘화 속의 연선은 부드러우면서 힘이 있었다. 선생은 성림다방 성좌다방 홍다방 등지에서 오전을 보내고 늦은 오후에는 선생을 추종하는 친구와 후배들을 이끌고 ‘쉬어 가는 집’을 비롯하여 막걸리 집 여기저기를 다니셨다.

선생은 내게도 3권의 스케치북과 누드를 그리다 만 유화, 그리고 초벌구이에 그림을 그려 구워낸 도자기 2점, 달마도 등을 주셨다. 그 중에서 화가 이중섭을 그린 그림과 스케치북 한 권을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적이 있는 중광 스님이 어느 잡지에 소개하겠다며 들고 간 기억이 난다. 그 그림들이 내게로 돌아왔는지 어쨌는지는 세월이 좀 지난 탓인지 가뭇하다.

평생을 한국의 산을 고집스럽게 그리고 있는 서양화가 김종복 여사가 프랑스에서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아 셋이서 중국음식점에서 식사를 한 적이 있다. 귀국 축하를 겸하는 자리여서 기름기가 많은 요리를 먹었다. 며칠 후 핼쑥한 얼굴로 나타나신 선생은 “와아, 그 중국음식을 좀 과하게 먹었더니 설사를 이틀이나 했다”면서 “나물밖에 안 먹었더니 내장 속에 기름기가 하나도 없었길래 그렇게 되었겠제”라며 얼버무리셨다.

선생은 생전에 자신의 임종을 자주 이야기하셨다. “나는 절대로 늙어서 자연사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승에서 떠날 마지막 시간은 내가 정한다. 그때는 노란색 수채화 물감을 화선지 위에 가득 풀어놓은 다음 청산가리를 마시고 붉은 피를 그 위에 토해 생의 마지막 작품을 그리고 죽을거야. 물감 위의 붉은 피가 어떤 형태의 그림이 될지는 나도 모르지만 나는 반드시 그렇게 죽을거야.” 나는 선생의 임종 구상을 듣고 있으면 섬뜩했지만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작업을 손에서 놓지 않으려는 그 의지에 찬탄을 금하지 못했다.

선생의 만년은 정말 고생의 연속이었다. 불로동 골목 안 반지하 사글세방에서 도동 측백수림 부근의 장님 집 아랫채로, 다시 금호강변의 지저동으로 옮겨 다녀야 했다. 중풍이 스치고 지나간 후에도 다리를 끌며 내가 다니던 매일신문사 커피숍으로 더러 나오셔서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하루는 “내가 그린 춘화 그림 6백여점을 오늘 아침에 불질러 버렸다”고 말씀하셨다. 임종이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마지막 걸작 청산가리 그림은 언제 그리시렵니까”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묻지 못했다.

토요일 낮 퇴근 준비를 하고 있는데 선생의 따님인 준미 여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생의 타계 소식이었다. 알려주는 대로 둘째 아들이 일하고 있는 불로동의 어느 농장으로 찾아가니 농막 같은 방 한 칸에 빈소가 차려져 있었다. 마침 토요일이어서 신문에 부음조차 내지 못하여 그 많은 술꾼들에게 알리지도 못했다. 주먹 하나로 동양 3국을 제패했던 어깨 박용주 선생은 만장 한 폭 휘날리지 못하고 조문객 없는 저승길을 홀로 떠나 청구공원 묘원에 안장됐다.

‘시인’과 ‘깡패’ 칭호를 맞바꾼 구상시인은 장례 후 얼마 있다가 서울에서 내려오셔서 고 이윤수․최정석 시인 등과 함께 유택인 묘원을 찾아 마주앙 포도주 한잔 씩을 올렸다.

“용주 시인, 깡패가 왔는데 왜 당신은 일어나지 않고 잔디 이불을 덮고 누워 계시오”

구상 시인은 선생의 무덤 옆에 자그마한 시비 하나를 세우는 일과 선생의 유고시집을 내는 일을 추모사업으로 정하고 서울로 떠나셨다. 시비 건립문제는 내가 맡아 노력해 보았으나 공원묘원 측과 유족 측의 연락과 동의가 쉽지 않아 지지부진했고 유고시집 출판문제는 나중 부산일보 김상훈 사장에게로 넘어갔으나 원고 수합 등이 여의치 않아 결국 빛을 못보고 오늘에 이르고 말았다.

시 한 편에 춘화 한 점씩을 삽화로 곁들였으면 정말 멋진 시집이 꾸며졌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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