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김옥균 참변 뒤 숨어산 여동생 김균
갑신정변 김옥균 참변 뒤 숨어산 여동생 김균
  • 대구경제
  • 승인 2023.02.02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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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독 자살한 걸로 기록된 김균은 한성을 탈출 떠돌아다니다가 1940년 오막살이 외딴집에서 발견돼
갑신정변 실패뒤 멸문지화... 김병기 삭탈관직, 김병태 김각균 옥사, 어머니와 두 살 아래 여동생 김균(金均) 음독 자살(역사 기록). 아내 유치상(兪致庠)과 딸은 관노

한국이 근대화 될 첫번째 기회인 갑신정변이 실패돼 한국 역사가 기구한 운명이 됐지만, 김옥균의 가문의 운명도 기구했다. 가문은 떼죽음을 당하고 살아남은자도 몰락했다. 아버지 김병기는 삭탈관직, 생부 김병태(金炳台)와 동생 김각균(金珏均)은 체포되어 감옥에서 옥사, 어머니와 두 살 아래 여동생 김균(金均)은 음독 자살, 아내 정경부인 기계 유씨(兪)와 딸은 관비(官婢)가 된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당시 민씨 정권에 영합했으면 김옥균은 고관대작으로 온 가문 식솔이 부귀영화를 누렸을터인데, 혁명과 개혁에 앞장선다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본다. 

음독자살한 것으로 알려진김균은 살아남아 판교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갑신정변 뒤 56년 여 만에 알려졌다. 1940년 8월 14일자 매일신보는 ‘고 김옥균씨의 친매를 발견 서천군하에 생존중’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김옥균의 여동생 김균이 충남 서천군 판교에 살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이를 전한 매일신보 기사를 살펴본다.

매일신보 1940.8.14

 

30여년 전에 세상을 떠난 개화당의 거두 김옥균씨의 매씨가 충남 서천에서 돌연히 나타나게 되어 고 김옥균씨를 추모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감회를 깊게 하였다. 그 매씨는 충남 서천군 동면 판교리 237번지에 사는 김균 여사로 현재 맏아들 송돈헌(宋敦憲)씨 부처에게 의지하여 극빈한 생활로 근근히 지내는 중이라는데 김균 여사는 노쇠하여 눈이 어둡고 말도 잘 하지 못하는 터로 소관 주재소 순사가 호구조사를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구한국시대 풍운이 험악하여 김옥균씨가 내지로 망명을 가게 되자 김여사는 죽은 것 같이 꾸며가지고 거짓 장사까지 지낸 다음 산송장 노릇을 하며 충청도 경상도 등지로 전전하면서 아들 내외에게 의지하고 지내오던 차 어느날 우연히 동네 사람들과 지나간 옛이야기를 하다가 그의 신상에 대한 말을 한 것이 동네 사람들이 알게 되었고 이어서 순사가 호구조사를 갔다가 그 소문을 듣고 진상이 판명된 것이라 한다.

이튿날인 8월 15일자에는 유일지 기자가 직접 작성한 속보 기사가 실렸다.

유 기자는 “웅지대략을 몸소 마음대로 펴지 못하고 철천의 유한을 품은 채 애처로운 일생을 끝맺은 한말지사 고균(김옥균의 호) 선생의 실매가 나타난 경로를 소개하는 것도 또한 고인을 추모하는 의의 깊은 기념이 될 것”이라며 판교 김균 여사의 집을 방문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사화 했다.

김옥균의 동생 김균이 살던 판교 집. 현재 타인이 살고 있다.
김옥균의 동생 김균이 살던 충남 서천군 판교 집. 현재 타인이 살고 있다.

 

“경남철도 판교역에서 내려 주재소 옆을 끼고 약 3정 가량 들어가면 산곡 사이에 겨우 풍우를 면할 만한 삼간두옥의 오막살이 외딴집이 있으니 이곳이 바로 서천군 동면 판교리 237번지요, 화제의 주인공인 김여사의 기구한 여생을 보내는 애처로운 생활의 근거지이다. 김여사는 고균 선생의 이름 중에서 ‘균’자만을 떼어 ‘김균’이라 하는 당년 87세의 노인으로 고균 선생이 혁명에 실패하고 내지로 망명한 후 정적의 독수로 일족의 참화를 목격한 김여사는 자결을 도모한 일도 있었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허위 장사로 세상의 이목을 속이고 금일 충청도, 명일 경상도로 조선팔도를 전전 유랑한 나머지 일곱 번 만에 현 재주지에 안착하야 오늘에 이른 것이라는데 슬하에 오직 외아들인 송돈헌씨가 있을 뿐으로서 아들 내외 세 식구가 산근야채로 겨우 입에 풀칠을 하야 괴로운 그날그날을 보내고 있는 중이라는데 마침 우연한 기회에 서천경찰서 판교주재소 순사의 발견으로 비로소 동양의 위인이요 병합의 원훈인 고균 선생의 세상에 끼친 오직 하나인 매씨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라 한다.

김 여사는 서천경찰서장 이하 간부의 끊임없는 방문과 지성의 위문에 다시없는 감격을 느끼면서 광명을 보지 못하는 노안에 이슬을 머금고 오라버니의 애음하던 한시를 낭랑히 읊으면서 당시의 술회를 말하는 김여사의 태도는 노쇠한 와중에도 아직껏 귀골의 기풍과 침범치 못할 엄연한 기상이 남아있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존경의 마음과 감개무량한 느낌을 지어내게 지어내게 하였다 한다.<후략>“

이때 김 여사가 읊은 김옥균이 애음하던 한시는 다음과 같다.

眞實丹心歸仙壽(진실단심귀선수)

滿頭白髮正重生(만두백발정중생)

이상 매일신보 기사 끝

1941년 1월22일 김균이 세상을 떠나자 매일신보는 1941년 2월 13일자와 14일자에 김옥균의 아들이 김균의 사망소식을 듣고 판교를 찾아왔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그 뒤로 수십년뒤 2021년 향토사학자로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사료위원인 박수환 전 한산면장이 조사한 <서천뉴스>에 따르면 김균 여사와 결혼한 송병의(宋秉義)는 거짓 장례를 치르고 새색시로 둔갑시켜 새 장가를 들어 충남 보령군 대천면 대천리 93번지로 이주했다. 보령으로 이주하게 된 계기는 김옥균의 양아들 김영진 보령군수의 배려였다고 한다.

김균 여사의 남편 송병의가 1929년 2월에 사망하자 아들 송돈헌은 서천군 판교면 판교리 237번지로 이주했다. 송돈헌의 아들 송재천은 판교면 흥림리에 사는 조용구의 딸 조민생과 결혼했는데, 1919년 종천면장에 부임한 조용구가 판교리로 이주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이다. 김옥균의 생질이자 김균의 아들인 송돈헌의 손자는 송태호 전 문화체육부장관이자 현 동아시아미래재단 이사장이다.

한편 김균의 묘는 판교면 저산리에 있었으나 30여년 전 청주에 있는 종산으로 이장했다가 2007년 세종시에 있는 대전공원묘원으로 다시 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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