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김옥균 참변 멸문... 숨어 산 아들의 인생
갑신정변 김옥균 참변 멸문... 숨어 산 아들의 인생
  • 대구경제
  • 승인 2023.02.02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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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일본으로 떠돌아다닌 아들 56년 만에 고모상을 당해 귀국...1941년 옛 매일신보 보도

한국이 근대화 될 첫번째 기회인 갑신정변이 실패돼 한국 역사가 기구한 운명이 됐지만, 김옥균의 가문의 운명도 기구했다. 가문은 떼죽음을 당하고 살아남은자도 몰락했다. 김옥균의 아버지 김병기(金炳基)는 삭탈관직, 생부 김병태(金炳台)와 동생 김각균(金珏均)은 체포되어 감옥에서 옥사하고, 어머니 송씨와 두 살 아래 여동생 김균(金均)은 음독 자살, 아내 정경부인 기계 유씨(兪)와 딸은 관비(官婢)가 된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민씨 정권에 영합했으면 김옥균은 고관대작으로 온 가문 식솔이 부귀영화를 누렸을건데 혁명과 개혁에 앞장선다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본다. 

갑신정변 당시 존재와 생사가 알려지지 않았던 김옥균의 아홉살 아들이 충남 서천에 나타났다는 사실이 갑신정변 뒤 57년 여 만에 알려졌다. 1941년 옛 매일신보 기사를 살펴본다. 김옥균 갑신정변 뒤 김옥균 일가의 멸문지화 속에 아들 57년 만에 고모상(김균)으로 귀국한 사실이 당시 언론에 보도됐다. 음독자살한 것으로 당시 기록된 김옥균의 누이동생 김균이 생존해 숨어살다가 56년만인 1940년에 생존사실이 처음으로 보도됐다. 1941년 1월22일 김균이 세상을 떠나자 매일신보는 1941년 2월 13일자와 14일자에 김옥균의 아들(유자)이 김균의 사망소식을 듣고 판교에 문상왔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갑신년 당시 9세이던 김옥균의 아들이 러시아로 일본으로 유랑하다가 잠시 귀국해 1940년에 김균의 생존사실을 보도했던 매일신보가 김옥균의 아들을 인터뷰한 것이다. 

매일신보 1941.2.13
매일신보 1941.2.14
매일신보 1941.2.14

 

아래는 매일신보 1941년 2월 14일자에 실린 김옥균 아들 유금덕(성을 어머니 성을 따라 유씨로 바꾸고) 인터뷰 기사 일부다.

 

“나는 유금덕(劉金德)이올시다.” 라고 노인은 남도 사투리로 인사하였다. 그는 얼핏 보아서는 쉰 대여섯으로밖에 보이지 않으나 금년에 예순다섯 빡빡 깎은 머리에는 틈틈이 흰 머리카락이 보이며 주름진 이맛살과 목 뒤 그리고 큼직한 그의 두 손은 무언 중에 오랜 동안 고달픈 노동에 시달려왔다는 것을 말하는 듯하였으나 아래쪽으로 쳐진 두 눈만은 나이에 비하여 생기를 돋구고 있었다.

매일신보 1941년
1940년 고모 김균을 찾아온 김옥균의 아들 유금덕씨. 사진 앞줄 왼쪽. 오른쪽은 송돈헌씨, 뒷줄 왼쪽이 김균 여사 오른쪽은 송돈헌씨 부인. 1940년 음력 9월 유금덕씨가 처음 고모 김균여사를 찾아왔을 때 찍은 사진으로 추정된다. 매일신보 

 

“나 때문에 일부러 먼 곳에서 오시느라고 매우 고생되셨겠습니다마는 나는 별로 지나간 옛 기억을 들추어가지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데 조금도 흥미를 느끼지 않습니다.”

현재 화태(樺太 사할린)까지 가서 살게 된 경로를 재차 물으니 “지금 내가 아들과 며누리를 데리고 살고 있는 곳은 ‘화태 영빈군 낙합정 대자심초자 남18선 서64(樺太 榮濱郡 落合町 大字深草字 南十八線 西六十四)’입니다. 그곳에서 16년째 농사를 지어가며 살고 있는데 그 전에는 북해도에서 산으로 돌아다니며 사냥도 하였고 주로 고깃배를 타고 각처로 돌아다니며 어업생활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 전에는 어디에 있었느냐고요? 하여간 내가 아홉 살 때 경성에서 어떤 선생과 함께 만주로 정처 없이 길을 떠난 후 나는 선친을 노리며 다니는 탐색들의 그물을 벗어나서 오직 살아나갈 결심으로 서백리아(西伯利亞 시베리아) 등지로 오랫동안 헤매었지요. 그러다가 오늘날 결국 내가 자리를 잡게 된 곳은 꿈에조차 생각하지 않았던 화태입니다.”

그는 조선말로만 말하는 것이 서툰지 간혹 알아듣기 어려운 사투리 국어를 섞어가며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대정2년(1913년) 북해도에서 취적한 호적등본을 꺼내어 놓는다. 이에 의하면 그의 원적지는 ‘북해도(北海道) 류붕군(留崩郡) 류붕정대자(留崩町大字) 류붕촌자(留崩村字) 32번지’로 되어있으며 명치36(1903년), 37년 경에는 산형현(山形懸) 출생의 상림 스에노(上林木野)와 결혼하여 큰 아들 긴사꾸(金佐久), 둘째아들 가쓰오(勝雄)를 낳았는데 아내 스에노는 소화14년(1939년) 11월 12일에 별세하였고 큰아들 긴사꾸는 소화12년(1937년) 북해도 어느 광산에서 죽은 것으로 기입되어 있다. 그리고 부친은 김옥균(金玉均), 모친은 김만천(金萬千)으로 되어있다.

“어째서 성은 유씨라고 되어있나요?” 하고 물으니

“명치17년 선친이 일에 실패를 보신 뒤 역적이라는 누명을 썼을 때 선친이 관계했던 급진당원의 육친은 말할 것도 없고 그 구족(九族)에 이르기까지 박해의 손이 뻗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그 박해의 손을 피하여 다닐 동안 시베리아에 가있을 때에는 ‘이반 마르코프’라는 노서아식 이름도 가졌지요. 그러던 것이 내지로 가면서부터는 김씨 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또 위험할 것 같아서 김이라는 성은 이름 자에 넣고 유(劉)가로 행세하면서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아홉 살 때 경성을 떠나 외지로 갔었다고 하는데 그러면 선친에 대해 남은 인상은 어떠합니까?” 이 물음에 씨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그것이 통여 기억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내가 여덟 살쯤 되던 해에 부친이 정좌관을 쓰시고 집에 오셨던 것 밖에는 모르겠습니다.”

“경성 어느 동리에서 출생하셨는지도 모르시나요?”

“그것조차 기억하지 못합니다.”

이리하여 씨는 열 살도 못되어 선혈로 물들여진 암흑시대를 만나 수십년 동안을 오직 공포심만을 안고 이리저리 피난생활을 해온 까닭으로 언문 글자 하나, 가나 한 자 쓰지 못하는 문맹이 되어버린 것을 자탄하며 한편 깊은 안개가 낀 듯이 어렴풋한 것을 유감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때 옆에 앉아서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송돈헌씨가 “이 분이 외삼촌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우리 집에 찾아온 것을 아는 사람 가운데 도모지 외삼촌의 아들로 확적히 믿지 않는 편이 많은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생각도 김옥균씨의 아들이라고 할 어떠한 증거가 있다면 몰라도 아직까지는 그것이 없으므로 마땅하나 안타까울 뿐이지요. 이분의 모습이라든가 순진하고 정직한 것이 돌아가신 어머님(김균 여사)과 비슷한 점이 많고 또 그 먼 곳에서 두 번씩이나(작년 음력 9월에도 한 차례 왔었다고) 이 빈한한 촌구석에 찾아오신 것을 보더라도 그 정의심과 열혈한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히 외삼촌의 아들임이 분명할 것이라고 생각케 합니다. 더욱이 이분이 아홉 살 때 경성에서 집을 나갈 지음 모친께서 ‘너는 김옥균씨의 아들이다’라고 하며 무엇이라고 쓴 비를 주신 일이 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하여 직접 물어보시지요.”

유금덕씨는 아홉 살 나던 해 그리운 어머니와 작별하고 집나가던 일을 돌이켜 생각하며 감개무량한 듯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금 전에 말했거니와 선친에 대한 인상이라고는 내 나이 여덟 살 때 정자관을 쓰시고 오셨던 근엄해 보이는 얼굴이 기억에 어렴풋이 남아있을 뿐인데 그중에서도 어머니에 대한 인상만은 엊그제 일처럼 여겨지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철모르는 아홉 살 때의 일로 어느날 아침 수심에 가득 차기는 하였으되 어딘지 모르는 큰 결심을 한 듯한 표정을 한 어머니가 나를 문밖으로 데리고 나가시더니 ‘너는 아무개의 아들이다. 내가 너를 잘 키워가지고 너의 아버지가 어떠한 분이라는 것을 내세워주려고 하였으나 지금 당장 변괴가 생겨서 아무 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라고 말 끝을 맺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시더니 ‘자 그러면 이것을 가지고 나가거라 그리고 한평생 잊지 말고 몸에 지니고 다녀라’는 말씀을 하시고는 사방 한 자가량 되는 무슨 비단 헝겊을 나에게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그 헝겊을 주시고는 곧 집안으로 되쳐들어가 사약을 잡수시고 스스로 생명을 끊으셨던 것입니다.”

이 때가 바로 명치17년(1884년) 김옥균씨가 박영효씨들과 더불어 무력행동을 단행하였다가 실패하고 내지로 망명한 뒤의 일로 혁명당원의 원가족에게 체포의 엄명이 내렸던 때이다. 그리하여 당시 김옥균씨의 부친 김병태(당시 63세)씨는 천안 군청에 감금되었고 어머니와 누이는 자살하고 동생 김각균은 명치18년 1월 내지로 망명하러 가던 도중 대구에서 암행어사 유석에게 붙잡혀 금부에서 죽어버렸다. 이리하여 당원 가족의 생명은 풍전등화나 다름없었으니 유금덕씨의 모친 김만천 여사도 모든 것을 각오하고 자살하기 전에 사랑하는 아들 유씨만은 살리려는 생각으로 나이 어린 그를 나아가게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당시 김옥균씨의 매씨 김균 여사도 남편 송병의씨와 난을 피하여 깊은 밤중에 경성을 벗어나서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으로 도망가 몸을 숨겼던 것이니 김균 여사도 이때 자살을 도모하였다가 실패한 뒤로는 아들 송돈헌씨와 함께 경상북도 영천군에도 가서 숨어있었던 것이니 이에 57년 동안이나 김균 여사의 존재는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유금덕씨는 이야기를 계속한다.

“그래서 어머니가 주신 비단 헝겊에 먹글씨로 씌어있는지도 모르고 30여년 동안이나 반듯이 허리에 차고 다녔지요. 그래서 그때 나는 경성에 있던 어떤 선생과 함께 정처도 없이 방랑의 길을 떠나 만주를 거쳐 시베리아까지 갔었습니다. 이때 알지 못하는 어떤 내지인이 너의 아버지 김옥균씨는 지금 일본에 계시니 나와 함께 가자”고 하며 나를 머나먼 북해도까지 갖다놓았습니다.[청일 양국은 김옥균의 신병 문제로 계속 부딪혔으며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신변 보호를 이유로 오가사와라 섬, 홋카이도 옆 낙도 등에 보냈다가 풀어준다. 나무위키] 나는 그곳에서 부친을 만나지 못하고 20여년 동안 고기잡이 생활을 하였지요. 그러나 이때까지도 어머니가 주신 비단헝겊만은 잊지 않고 허리춤에 넣어가지고 다녔는데 내 나이 마흔네살 되던 해(1919년) 어떤 날 평상시와 다름없이 고깃배를 타고 고기 잡으러 나갔다가 굉장한 풍랑을 만나 배는 엎어지고 몇 사람은 바닷물 속에 휩쓸려 들어갔었지요. 그래서 나는 간신히 뱃조각을 잡고 사흘 동안이나 떠내려가다가 구원을 받았는데 이 중에 귀중한 비단 헝겊을 물에 떠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도 오늘에 이르러 생각해보면 운명의 짓궂은 장난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라고 말하며 씨는 선친과 자기가 버젓한 부자 사이임을 웅변으로 증명할 귀중한 것이 없어졌음을 개탄하였다.

“그것을 잃어버린 뒤 나는 얼빠진 사람이나 다름없이 되었고 더욱이 앞으로 살아나갈 흥미조차 잊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상림 스노에와 결혼한 뒤에도 두 아들까지 낳기는 하였으되 ‘비단헝겊’에 관한 이야기만은 하지 않았었는데 그때 비로소 비단헝겊 잃어버린 사건을 이야기하며 나는 살았어야 산 것이 아니라고 한바탕 호통을 부렸었습니다.”

당시의 광경을 눈 앞에 그려보는 듯 그의 두 눈으로는 아지 못할 빛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러면 선친께서 상해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어떻게 아셨습니까”라고 물으니 그는 “그 일도 풍편에 들었지요. 그때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선친께서 상해에서 약주를 과히 잡수셨기 때문에 화를 입은 것으로 알았었습니다. 그래서 나 역시 이전에는 술을 상당히 마셨으나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는 오늘까지 한 방울의 술도 입에 대지 않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유씨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 중에도 선친이 별세한 오늘 자기와 김옥균씨가 틀림없는 부자관계에 있는 것을 일반에게 알릴만한 증거가 없음에 마음이 쓰라린 모양이다.

“그러면 선생은 지금 선친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나는 원래 무식하므로 무엇이라고 대답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온 세상 사람들이 부친을 충신이라고 불러만 주면 아무 한이 없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그는 김옥균씨가 50년이나 다름없이 역적이라는 누명을 벗지 못하고 있는 줄로 여기고 있는 모양이다.

“선친께서는 오늘 일한합병을 위하여 애쓰신 분으로 누구나 추앙할 수 있으며 더욱이 내선일체의 기초를 세운 분으로 크게 공적을 찬양하고 있는 터인데요.”라고 말한즉 그는 “하여간 무식한 중에도 공포 속에만 사로잡혀 살아온고로 전혀 똑똑한 것은 모르나 최근에 이르러서야 겨우 선친에 대한 생각이 변해져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전만 하더라도 조선에 와서는 살고싶은 생각이 없었는데 2, 3년 동안 한차례씩 조선에 와서 형세를 보아가지고 살아볼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씨의 얼굴에는 50여년 동안 공포 속에서 지내오다가 밝은 세상을 만났다는 명랑한 빛이 떠오른다.

“선생은 이번에 또 화태로 가십니까?”

“고모님의 49재를 치르고 가렵니다.”

“내년에 또 오십니까?”

“3년 동안을 두고 1년에 꼭 한 차례씩 오겠고 4년 되는 해에 그저 화태에서 살 것인가, 조선에 와서 살 것인가를 결정지으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밖에는 함박꽃 같은 눈이 내리고 있다. 유금덕씨와 송돈헌씨에게 작별의 인사를 하고 나오니 때는 허벅지게 내린 눈 위에 황혼이 짙은 오후 7시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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