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당 중창기(A memoir of rebuilding the house)
소소당 중창기(A memoir of rebuilding the house)
  • 대구경제
  • 승인 2023.03.29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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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남아 이어지는 집의 중건기가 최근 올려져 이채로워 
낙제 김지찬 선생 뜻 이은 宗宅으로 문중 재산으로 관리된다

십승지 중 으뜸으로 알려진 전통마을 경상북도 예천근 금당실 마을에 현대에 드물게 역사 이야기가 남아 이어지는 집의 중건기가 최근 올려져 이채롭다.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422-1,3(금당실길52-16,18) 에 전통한옥형식으로 중건된 소소당은 낙제 김지찬 선생의 뜻을 이은 종택(宗宅)으로 문중  재산으로 관리된다.

아래는 소소당 중창기 전문이다.

소소당 중창기(素素堂 重創記,A memoir of rebuilding the house)

 증조할아버지(김창기金昌基,1880~1949)께서 왜적을 피해 안김(安金) 족친들과 대대로 살던 풍산 소산(素山)동에서 진외가(全基恒의사)가 있던 십승지(十勝地) 예천 금당실로 1900년대 초 피난오셨으니, 어언 이주갑(二周甲,120년)이다. 증예조참판 靑巖 金泰寬(청암 김태관)의 6세 손 중에 맏손자(冑孫)로, 열두살 아홉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의고 누이와 서제(庶弟,渡日)가 있었다. 1920년대 ‘금관자(金貫子) 서 말 난다’는 이곳 동촌 언덕 초가삼간이 있던 삼백 평 터전을 새로 마련해 아래채는 손수 짓고, 별채는 소산에 살던 옛집을 본 따서 林 대목장을 시켜 건축했다. 적수공권으로 이곳에서 3남1녀(상진 우진 성희)를 키웠으니 그 고생은 가히 눈물 겨웠으리라. 기품과 기상이 남달랐다는 세평처럼 “남자는 心志가 굳어야(持心) 한다(朱子어록)”고 가르쳤고 해방 이후 소산 귀향을 포기했다.

 할아버지(김상진金相鎭, 족보명護鎰, 아명兒名,붙들이 1918~1981)는 일찍이 한학을 배웠으며, 새로운 살길을 개척하기 위해 도만(渡滿봉천), 도일(渡日오사카)하는 모험을 하고,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해 투옥되는 수난도 겪었다. 할머니(새원댁, 順天김을출 1915~1965)와 사이에 7남매(강구 초순 순자 정구 명구 윤희)를 두었다. 해방 후 일제가 강탈해간 옛 종을 찾아와 다시 복음의 종을 울려 용문면민에게새벽과 저역시간을 알리고, 금곡구락부가 용문 땅에 신학문 배움의 터전이 되도록 성심(誠心)으로 다했으니, 그 수고는 어찌 필설(筆舌)로 다할 수 있으랴.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와 같은 분이었다. 평소 말씀하신 ‘소부재근小富在勤 대부재천大富在天(작은 부는 부지런함에 있고, 큰 부는 하늘에 있다)’과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응답은 여호와(天)께로부터 나오느니라”는 잠언을 높이 받들어야 한다.

 아버지(金康求 호적江九, 1940년 정월대보름~2022.양력7.25)는 두 남동생을 도시로 보내고 고향집을 지키며 1970년대초 초가삼간 본채를 뜯고 흙벽돌을 찍고 뒷산 소나무를 서까래로 삼아 ‘ㄱ’자 한옥을 지었다. 전답을 잃고 어머니(진성李分吉, 1941년 정월초하루~양력2018.12.21)와 대구로 가서 勞商을 했다. 어머니는 남이 나에게 그릇되게 대해도 나는 바로 도리를 다해야 한다는 바로 ‘仁’의 삶이었다. 아버지는 배우신 주자집주(朱子集註)와 사서(四書)의 "소년이노학난성, 일촌광음불가경(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不可經)”을 슬하(정모 성모 수정 미정)에 강조하며 “수양산 그늘이 강동 800리를 간다”고 가문 부흥과 '義'로움을 받들었다.

 돌이켜 선대를 보면, 청암공은 동지중추부사 태중(泰重,生家), 병조참판 태운(泰運) 형제와 함께 贈이조참판 김세보(金世寶)의 아들이고, 증(贈)호조참의 김암종(金黯宗)의 손자이고, 한강 정구(寒岡 鄭逑)에게 배우고 22세에 진사가 돼 병자호란에 의병을 일으키고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이 필첩 서문을 지은 낙제 김지찬(樂齊 金之燦)의 현손이다.

낙제공은 서화(書畵)를 풍신수길의 사신(使臣) 겐소(玄蘇) 등 외교관이 선물로 가져가고 선조왕의 부름으로 글을 쓴 당대의 명필 독성헌 김취성(獨省軒 金就成)의 아들이고, 구제 김취영(懼齊 金就英,生家), 병자호란에 순절한 武將 金就雄의 조카다. 세인들이 왕휘지 三父子에 비유했다.

구제공은 임진왜란 시 유성룡과 함께 전쟁터 마상(馬上)에서 ‘啓 敏給無碍又獲入倭’란 격문을 돌렸으며 국왕 선조의 어첩십폭(御帖十幅)을 쓰고 1622년 충정공 권벌의 신도비문에 이황(行狀) 정경세(撰) 김상용(篆)과 함께 글을 써 白衣정승으로 불리며 선무녹훈을 받았다. 낙동강 귀래정에 詩文(李宏 개성유수 추모)을 쓰고 창수록(唱酬錄)을 남기고 상설상숙(嘗設庠塾)을 세운 유학자 우제 김존수(愚齊 金存水)의 5세손이다.

 선대의 피땀이 서려 있는 이 터는 옛날 그대로이나 고가는 오랜 풍우로 쇠락했다. 그 유업을 영세토록 기리고자 2020년부터 경상북도 후원도 받아 원래 좌향(坐向)에 김규현 건축사가 내진설계하고, 김천 도편수 金敬千이 홍송(紅松)으로 짓고 고령토기와로 지붕을 얹었다. 기둥높이 8자반, 굵기 8치다. 선자 서까래(扇子椽) 천장의 내루(內樓)는 민흘림 원주(圓柱)가 웅장하다. 병약한 아버지께서 편리하시도록 집안 바닥은 턱 없는 평면이다. 長大화감석으로 기단을 두르고 월대(月臺)를 마련했다.

집을 중건하고 나니 그립고 그립다. 가지가 줄기에서 나고 그 줄기가 뿌리에서 자란 것과 이치가 같으니, 뿌리를 받들지 않는다면 금수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용문 유권자(10대 부호) 증조부님이 내리신 살림 밑천으로 오늘의 우리가 있으니, 이 집을 10년 20년 준비하여 중창해 중건기(重建記,A memoir of rebuilding the house)를 건 이유다.

당호 소소당(素素堂)은 “청렴 검소는 집안의 본분”이라는 낙제공 말씀의 흴 ‘소’, 인(仁)을 예(禮)보다 귀중히 여기고 꾸밈보다는 바탕(본디)을 소중히 여기는 회사후소(繪事後素) 가훈의 본디 ‘소’에서 따왔으며, 편액은 정종섭(鄭宗燮) 서예가의 옥필로 김우섭이 새겨 걸었다.

이 집이 만지동근( 萬枝同根)의 낙제 종택(宗宅)으로, 수신(修身)과 승기(勝氣)의 공간이 되어 뿌리 깊은 나무, 장엄한 장강(長江)처럼 천추만대(千秋萬代) 세가(世家)를 이루도록 하느님께서 오래 오래 복록(福祿)을 내리소서. 안동 예천 땅에 천천(千千)의 내(川)를 비추는 달처럼, 만만(萬萬)의 동산을 비추는 해처럼 영원하리

서기 2021년 초여름

子孫 金正模(準模) 법학 박사가 삼가 짓고, 향토사가 김봉균 철학 박사가 감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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