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언론인 출신 이낙연이 드러내는 한국언론의 현실
성공한 언론인 출신 이낙연이 드러내는 한국언론의 현실
  • 대구경제
  • 승인 2023.07.04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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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로서 화려한 이력이 갖고 있는 강점과 한계

'엄중한 말'에 엄중한 문제의식과 실천 있는가

이명재 민들레 에디터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귀국한 직후인 2일 작심한 듯한 발언을 내놓아 많은 주목을 받았다. “민주당이 국민 눈높이에 맞는 혁신을 해야 하며 혁신의 핵심은 도덕성 회복과 당내 민주주의 활성화다”라고 말한 것이 당을 이끌고 있는 이재명 대표를 겨냥한 비판인 것으로 풀이되며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이 전 대표의 말은 그 말 자체로는 나무랄 데 없는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이 거센 논란을 빚고 있는 것은 그 배경과 맥락, 시점을 놓고 볼 때 귀국 일성으로 과연 적시의, 적절한 말이었는가에 대한 찬반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 대표의 이같은 발언과 행보는 '정치인 이낙연', 거대 정당의 지도자이며 대통령에 대한 꿈을 다시 가동한 듯한 이에 대해, '이낙연의 정치'에 대해, 특히 언론인 출신으로서 그의 말과 정치에 대해 다시, 혹은 제대로 평가해 볼 필요를 제기하고 있다.

그가 기자로서 화려한 이력을 쌓아 왔다고 하는 데에는 많은 이들이 일치하는 듯하며, 그같은 기자로서의 성공과 경력이 정치에 뛰어드는 데, 또 정치인으로서의 위상을 높이는 데 발판이 되고 자산이 되어 왔다는 것에도 이론이 별로 없을 듯하다.

그러므로 그의 정치인으로의 변신과 정치인으로서의 이낙연은 언론 출신의 정치 참여, 성공한 언론인의 정치인으로서의 면모의 강점과 한계를 드러내는 한 전형을 보여준다. 정치인 이낙연의 모습은 언론인 출신 정치인, 나아가 한국 언론의 현실의 중요한 면을 보여준다.

그에 대해 흔히 말과 글이 뛰어나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평소에 많이 쓰는 말을 빌리자면 정치인 이낙연에게선 ‘엄중한 말은 있었으나 엄중한 참여는 없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바로 이 점에서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는 말이 있듯이 무언가를 흥하게 하는 것은 그것을 망하게도 한다는 것의 이치가 말과 글에서도 통한다고 할 수 있다.

'말의 엄중함'은 분명 좋은 태도이며 미덕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말의 엄중함의 실상, 그것의 넓이와 깊이, 무엇보다 그 말이 향하고 있는 사안의 본질과 근원에로 이르고 있느냐다. 이 대목에서 이는 언론인 출신으로서 한국언론의 '객관적' 태도와도 겹치면서 그의 엄중은 ‘엄중 객관’을 의미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객관성은 사안에 대한 냉철함, 이성적 거리이지만 제3자적 태도를 취하는 것에 갇혀버릴 때 그 객관은 그 사안과 문제로부터의 이탈로, 자신을 ‘탈 주체’의 3자적 관찰자로 벗어나게 해버린다.

이는 그의 정치가 한국사회 현실과 정면으로 직시하는 데에 이르지 못하는 한계로 작용한다. 기자는 흔히 많은 경험을 하는 직업으로 여겨지고, 그 경험은 정치인에게 좋은 자산일 수 있지만 그러나 기자로서 겪는 모든 경험이 곧 ‘체험’인 것은 아니다. 단지 일을 겪는 것으로서의 경험은 그 자신이 그 일을 '겪어내는' 것이라야 '체험'이 된다. 그렇지 못하다면 그가 속한 사회에 대한 뿌리째의 발본적인 문제의식, 이를 테면 ‘근원 체험’이 될 수 없다.

그리고 그 같은 체험적 경험, 발본적 문제의식이 없다면 객관적 비평은 진정한 '객관'에도 이르지 못한다. 객관비평의 역설은 그것이 전적으로 3자적 비평에만 그쳐서는 오히려 온전한 비평이 안 되며, 제대로 된 관찰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비평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비평이 3자적 관찰 이상의 깊이, 그 문제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려는 절실함을 갖추고 있느냐에 있는 것이다.

한국의 정치사에서 기자 출신 정치인들이 드러내는 한계와 실패의 상당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자로서의 경력이 화려할수록 정치에서 빈곤해지는 것의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는 기자들의 정치권 진출에 대해 이른바 ‘폴리널리스트’ 비판이 제대로 겨냥해야 할 게 어떤 것인가라는 문제와도 연결된다. 사실 언론인의 정치 참여는 정치와의 불순한 결합이라기보다는 공공의 영역에서 공적인 사안에 대한 관심과 지향에서의 일치라는 점에서 오히려 긍정적으로 봐야 할 측면이 있다. 언론 출신의 정치 참여에 대해 필요한 비판은 언론계 출신 정치인들이 드러내고 있는 더욱 본질적 문제, 즉 자신이 속한 사회의 현실을 얼마나 깊이 보고 넓게 보느냐, 그 깊이와 넓이로써 사회와 현실의 진면목에 파고 들어가느냐에 대한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언론 출신 정치인들에게서 발견되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무엇보다 그들이 자신이 소속되고 참여하는 사회를 비평가, 그것도 표피적인 비평가를 넘어서 치열한 문제의식으로 정면 직시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근본성, 치열성에서의 결핍과 미진이라는 것이다. 그가 옆에서 취재하며 가까이 지냈다고 자주 얘기하는, 그래서 김대중 정신을 곧잘 얘기하지만 김대중 정신의 실천에 이르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도 거기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이낙연의 언론인으로서의 성공이 정치인으로서의 성공을 불러 왔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는 그 성공이 어떤 성공이냐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정치에서의 한계와 실패는 곧 그가 속하고 성장했던 언론의 실패와 한계이기도 하다. 이낙연에게서 한국정치를 보는 것과 함께, 한국언론을 보게 되는 것이다. 정치인 이낙연 이전에 언론인 이낙연, 그리고 이낙연의 성공을 낳았던 한국언론의 실상과 면모를 봐야 하는 것이다.

성공적인 언론인은 성공적인 정치인으로, 뛰어난 지도자가 되는 것이 필연적인 것은 아니더라도 그 직업의 속성과 덕목에서 상당 부분 일치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필요한 질문은 기자로서의 성공, 기자라는 직업에서의 성취는 무엇이 돼야 하느냐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성공과 성취가 흔히 얘기하듯 언론인의 지사적 덕목에의 요구인 것은 결코 아니다. 단재 신채호나 백암 박은식과 같은, 조선의 선비들과 같은 지사 의식을 요구하려는 것이 아니다. 신채호나 박은식은 지사 이전에 당대의 언론에 요청되는 직분에 충실하려 했던, 그 시대의 기자 직분에 요구되는 성실성을 다하려는 언론인이었다. 당대의 기자라는 직분에 요청되는 성실성을 신채호와 박은식이 갖고 있었듯 지금의 기자, 언론에는 지금의 기자, 언론으로서의 성실성이 있다. 시대와 환경에 따라 그 성실성의 형태와 내용은 달라지지만 그 본원성이 있다면 그가 속한 사회의 문제와 정면으로 부닥치는 것에 충실하려 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이낙연 대표의 정치인으로서의 본원적 성실성 또한 기자로서의 본원적 성실성의 폭과 깊이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성공과 한계에 한국언론의 지금의 중요한 현실이 압축돼 있다. 그에 대한 자각에 정치인 이낙연의 과제와 한국언론의 과제가 겹쳐 있다.

(이 글은 동아일보 기자 출신인 시민언론 민들레 이명재 에데터의 글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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