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 월북 화가 이쾌대(李快大) 그리고 예술
향토 월북 화가 이쾌대(李快大) 그리고 예술
  • 대구경제
  • 승인 2024.03.10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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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대구를 한국 근대미술의 본고장이라고 한다. 어느 지역보다 빨리 서양화가 도입됐고, 일찍이 화단이 형성되면서 한국 근대미술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으며, 근대사의 수많은 질곡 속에서도 대구만의 특색 있는 미술 문화를 발전시켜왔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 근대미술사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이인성, 이쾌대, 이상춘 등이 대구지역 출신이다.

19458월 해방 이후 이념 갈등과 사회 혼란 정국과 동족상잔의 6.25전쟁을 거치면서 고착된 이데올로기와 남북 분단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미술계에서도 월남화가” “월북화가라는 용어가 생겨났으며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분단의 미술사가 지속되고 있고 이 분단의 미술사 속에 월북화가 이쾌대(1913~1965)가 있다.

그의 행로의 보면 그의 미술세계에도 드러난다. 경북 칠곡군 지천면에서 출생했다. 대구 수창보통학교, 경성 휘문고등보통학교에 다니면서 화단에 데뷔했고 동경제국미술학교(東京帝國美術學校)를 거치면서 근대미술과 인연을 맺었다. 서양화가로, 서구미술 속에서 한국의 근대를 적극적으로 해석했던 화가이다. 1939년 귀국해 다양한 미술활동을 펼쳤다. 광복 후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활동하였으나 정치 이념의 차이를 겪으며 독립미술협회, 조선조형예술동맹을 거쳐 조선미술동맹으로 옮겼다. 1947년 북한을 다녀온 뒤 북한의 체제에 실망한 그는 조선미술동맹에서 탈퇴하고 조선미술문화협회를 결성하여 독자적인 길을 걷기도 했다.

그러나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그림으로 증언하고자 했던 민족미술에 대한 그의 꿈은 멈추고 말았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강요로 김일성,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리는 강제부역을 했고 또 서울 수복 때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히는 시대적 비극을 그대로 경험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포로 교환 당시 그는 북한을 선택했다.

북한에서의 미술활동은 이어졌다. <31운동>,<농악>,<송아지> 등의 작품을 발표했고, 중국 인민지원군 우의탑에 벽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1965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친형인 이여성이 1950년대 숙청되었다. 이쾌대도 그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쾌대가 남긴 그림은 주로 일제강점기, 해방기, 한국전쟁기인 한국역사의 비극적 시대인 1930년에서 1950년 무렵에 걸쳐 창작되었으며 <군상(해방고지),, , 군상(조난)>,<푸른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부인도>,<봄처녀>,<무희의 휴식>,<걸인>,<부녀도>,<상황>,<2인 초상>,<이여성 초상> 등 있는데, 서사적이고 장엄한 화풍으로 '한국의 미켈란젤로'라는 별칭을 가지게 될 정도로 예술혼을 꽃피운 위대한 화가이지만 남과 북 어디에서도 재대로 인정을 받지 못한 비운의 화가였다.

남한에서는 1988년 월북미술가들에 대한 해금조치가 단행되었다. 이쾌대도 그 대상이였다. 월북 당시 남한에 이별한 그의 아내 유갑봉과 자식들은 힘들게 보관했던 40여점의 작품과 스케치 등이 199110월북작가 이쾌대전이 열리면서 공개되었다. 이어서 1999년 김정일의 지시로 복권되어 북한미술사에 다시 그의 이름이 올려졌다.

남북 모두가 이쾌대의 미술을 인정한 것이다. 그가 죽은 30년이 지나서다. 미술가로서의 이쾌대가 남긴 담론은 암흑과 격동기라는 굴곡의 시대상황에서 민족의식과 시대정신을 예술세계의 토대로 삼은 그의 예술을 이 시대가 받아들일 수 있어서 다행이다.

남북분단 속에서 남북 모두가 인정하는 예술가로서 자리 잡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새쌈 느낀다. 어디 이런 예술가가 이쾌대 한 사람만이겠는가? 아직도 남북 어디에도 인정받지 못하고 경계인의 삶을 살다간 예술가들에 대한 진정한 평가가 하루빨리 이루어졌으면 한다.

서정숙(한국화작가 대구환경미술협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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