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
  • 대구경제
  • 승인 2018.08.15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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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 김가진선생과 부모 김의한, 정정화 선생은 독립운동의 전설
독립운동이 없었다면 연합국이 한국을 독립시켰을까?
건국 논란으로 임시정부가 새롭게 조명

또다시 건국논란이 일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임시정부수립일이 건국일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현재 정부에서 주관하는 대통령 직속 ‘3.1 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회’가 출범했다.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다 돌아가신 많은 분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1945년 일본을 패망시킨 연합국은 한국을 독립시켜 우리는 독립된 국가에서 살고 있다. 일본의 식민지중 유구(오키나와)국은 독립시키지않고 오늘날까지 일본 영토다. 그들의 독립운동을 한국처럼 가열차게 한 적이 없다.

작년 12월 문재인 대통령이 국빈 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했을 때 충칭의 임시정부 청사 계단에 모여서 사진을 찍었다. 당시 김정숙 여사 옆에 서 있던 어르신이 김자동 회장. 오른쪽은 1945년 찍은 임정 요인들. (사진 청와대 자료)

 

지난 2004년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이끌어 온 김자동 회장을 서면으로 인터뷰했다. 그의 조부 김가진선생과 부모 김의한, 정정화 선생은 독립운동의 전설이다.

김회장은 1929년생으로 지금 아흔이 넘은 고령이다. 현재 임시정부와 관련된 인사들 서너 분이 생존해 있다.

100여 년 전, 김자동 회장의 조부와 부친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진 중국으로 망명했다. 김자동 회장이 중국에서 태어난 연유다. 1945년, 충칭 임시정부청사 옆 광복군 숙소에서 광복을 맞았다. 광복 이후에 귀국했다.

김구 선생이 안고 있는 아기가 김자동 회장, 오른쪽이 김자동 회장의 어머니 정정화 선생.

 

Q. 73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있다. 중국에서 8.15 광복을 맞이했을 때 어땠나?

A. 1945년 그 해 여름 중국 충칭은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웠다. 머지않은 시기에 일본이 항복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8월 15일 저녁 8시쯤이었나 보다. 그 때 내 나이 17살이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고등학교 1학년생에 불과했다. 나는 일찌감치 잠을 청했다. 그런데 한집에서 같이 지내는 사람들 몇몇이 집안으로 들어오면서 떠들썩하게 “만세” 라고 외쳤다. 나는 그때 충칭 임시정부 청사 근처에 있던 광복군 숙소에서 합숙하고 있었다.

일본 시간 기준으로 낮 12시에 일본 천황이 라디오를 통해 항복을 선언했다고 한다. 시차가 늦어서 충칭에 전달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길거리를 나서니 중국인들도 환호하면서 너도나도 딱총(화약총)을 들고 쏘아대고 있었다. 축제와도 같은 저녁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자정이 넘어서 부모님이 계시는 집으로 갔다. 내 예상대로 부모님은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으셨다. 두 분이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부모님의 얼굴은 심각해 보였다. 두 분은 일본의 항복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계셨다.

당시 광복군 산하 국내 진입부대가 막 훈련을 끝내고 국내 침투작전을 준비 중이었다. 그런데 광복군이 국내 침투작전을 수행해 보지도 못한 채 일본이 항복했다.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어린 나도 어렴풋이 부모님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8.15 광복 후 미국은 일본의 선전대로 조선이 독립할 여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38선을 경계로 분할해서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주둔했다. 미군은 한반도 남쪽의 치안 유지가 우선이었다. 일제 때 순사 출신을 다시 경찰로 기용했다. 중국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일본군과 전쟁을 벌였던 광복군 출신을 우대하지 않았다. 거기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해서 지금에 이르렀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김자동 회장.

 

Q. 조부 김가진 선생에 이어 아버지 김의한 선생, 어머니 정정화 선생도 독립운동가였다.

A.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을 벌일 때 아버지는 만 19살 늦깎이 중학생이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데리고 중국으로 망명했다. 할아버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고문으로 계시면서 독립운동을 하셨다.

당시 중국 상하이는 영국과 프랑스가 합작한 공공기차공사가 기차와 버스를 총괄해서 운영했다. 영국인 대표는 승차권 검표원으로 중국인보다 성실한 조선인을 채용해서 조선인 직원들이 100여 명에 이르렀다. 아버지가 검표원으로 취직해서 돈을 벌면서 영어와 중국어를 습득했다.

Q. 중국에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활동이 쉽지 않았을 텐데

A. 1932년 1차 상하이사변으로 일본이 중국 상하이의 절반을 점령했다. 1월 28일 일본군이 상하이를 공격했을 때 지방군이 5주간 버티면서 항전하다가 중앙 정부군의 지원이 없어서 3월 25일 휴전협정을 맺었다. 4월 29일 일본 천황의 생일에 맞춰 홍커우 공원에서 경축행사를 벌이기로 했다. 일본은 상하이에 진출한 미국, 영국, 프랑스 인사를 초청했으나 일본군의 불법 점령을 문제 삼으면서 불참을 통보했다.

홍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질 때 일본군 고위관료만 있었다. 중국인들은 일본군의 상하이 점령에 분통 터져하다가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보면서 고맙게 생각했다. 그때부터 중국의 민간인들이 모금해서 임시정부를 돕기 시작했고, 중국의 장제스 정부는 일본군의 눈을 피해 뒤에서 지원했다.

Q. 김자동 회장이 기억하는 김구 선생의 모습은?

A. 김구 선생은 일본군에 의해 현상금이 걸려 있어 가족들과 떨어져서 따로 살았다. 임시정부의 경제적인 형편이 좋지 않아서 아침식사를 간단하게 죽으로 떼웠다. 김구 선생은 체구가 커서 금방 허기가 졌다.

어머니는 김구 선생을 반갑게 맞이하면서 늘 2인분의 밥을 준비했다. 어머니가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김구 선생은 어린 나를 안아서 어르고 있었다고 한다. 나는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상하이에서의 기억은 없다. 4살 때 창사로 이사했다. 그 이후 기억은 또렷하다.

김구 선생이 거주하던 집에서 뒷문으로 나가면 호수가 있었다. 목선을 타고 호수를 건너가는 데 여자 뱃사공이 있어서 노를 저었다. 만약 일본군이 들이닥치면 뒷문으로 빠져나가서 배를 탔다. 집 유리창에 하얀 천이 내걸리면 안심하고 귀가했지만, 하얀 천이 아니면 며칠간 배 안에 머무르면서 지냈다.

Q.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 중에서 특별히 친했던 분이 계신다면?

A. 마지막 충칭 청사에 있었던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은 다 기억난다. 나는 이시영 선생만 할아버지라고 불렀고, 나머지는 다 아저씨라고 불렀다. 선정부장을 맡았던 엄향섭 선생과 한집에서 같이 살아 아주 가까웠다.

김자동 회장과 딸 김선현씨.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뜻을 기리면서 지금껏 유지되어 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의 뿌리다. 우리 대한민국의 법통이며, 헌법에서도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라고 밝혔다. 대한민국은 4월 11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중국 시진핑 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중국 각지에 흩어진 우리의 임시정부청사를 비롯한 독립운동 사적도 보존하겠다고 했다. 현재 중국 곳곳에 6개의 청사가 보존되어 있다.

김자동 회장의 말을 듣는 내내 울컥해서 눈물을 쏟을 뻔했다. 그동안 책에서 보았던 역사적 사건이 김자동 회장의 입을 빌어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역사의 현장에 가서 목격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렸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는 매년 음악제, 영화제, 문학제 등을 열고 있다. 지난 6월 1일, 2일 서울, 18일 부산에서 개최한 음악제에선 임시정부 인사들 중 음악가였던 좌파 정율성 선생, 우파 한유한 선생 두 분의 곡을 갖고 창작오페라를 공연했다.

오는 9월 6일부터 10일까지 서울극장에서 개최될 영화제는 레지스탕스영화제로 국내 최초의 역사 영화제다. 뒤이어 11월에 개최될 문학제는 ‘백년의 약속’이라는 주제로 열릴 예정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누리집에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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