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것이 기적, 脫北入南女의 만리 야화 - 20 죄인
살아있는 것이 기적, 脫北入南女의 만리 야화 - 20 죄인
  • 이향단
  • 승인 2018.08.19 07: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이승희(만주에서부른 이름은 이향단)의 육필수기

20 살아남은 죄인

운명은 권위를 경멸한 나를 벌하기 위해 나 자신을 권위자로 만들었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

우리는 함경북도 회령시 유선구에서 살다가 한국에 가려고 중국으로 탈북하다가 북경대사관 앞에서 중국 공안에 의해 잡혔다. 우리는 북송 되어 정치범수용소에서 죽을 고생을 다하고 창태리로 추방되었다.

 

두 달 남짓 우리 동네로 또 한 집이 추방돼 올라왔다. 그 집 아저씨는 재일 교포였다. 아저씨는 밀수를 하다가 잡혀서 감옥에 갔다가 나오면서 창태리로 추방돼 왔다.

중국에서 북송되어 정치범수용소에서 조서를 받을 때 식구 다섯 명이 들어갔으니 조서를 받을 때는 다섯 명의 말이 일치할 때까지 받는다고 누군가 이야기해 주었다. 조서시간이 길어지면 사람이 힘들어진다고 말한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조서시간이 길어질까 봐 ‘이제부터는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일이야.’하고 결심하고 모든 일은 아버지에게로 밀어놓았다. 그래서 나는 세 번 밖에 조서 받으러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날마다 조서 받으러 나간다. 그 다음으로 오빠가 많이 조서 받으러 불려 나간다. 수용소에 있을 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생각하고 모든 일을 아버지에게로 밀어 놓았던 것을 너무 후회했다. 모든 죄를 아버지에게만 뒤집어씌운 것만 같아 너무 죄송스러웠다.

살아생전 그렇게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 주셨는데 나는 나만 살겠다고 모든 죄를 아버지에게 넘긴 것만 같아 아무리 땅을 치며 통곡을 해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한 많은 이 세상 인생을 마감하시면서 자식들을 앉혀놓고 하실 말씀도 많으셨을 텐데 차디찬 감방에서 인생을 마감하시면서 얼마나 외롭고 억울하셨을까?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나 혼자만 살아서 너무 죄송합니다. 아버지……. 이 땅의 원한 맺힌 설움이 시효 없는 아픔으로 가슴에 남아 있다.

한 많은 세상에서 살아가시면서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쳐 살아오신 아버지 목 터져라 불러봅니다. 자식들을 위해 모진 비바람 다 막아주시며 자식들을 품에 안아 키워주신 아버지, 이 죄인은 오늘도 아버지 사랑의 그리워서……. 울고 또 울어봅니다.

정치범수용소에서 조서를 받을 때 가족들의 말하는 것이 다르면 조서시간이 길어진다는 말을 듣고 모든 것은 아버지의 계획에 따라서 움직였다고 했다. 대사관에는 왜 갔는가? 하는 물음에는 대사관에 가면서 남한에 고모가 살아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고모를 찾고자 대사관을 가게 되었다고 말했다. 두만강은 어떻게 건너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낚시를 하면서 자리를 봐 두었던 곳으로 넘어갔다고 이야기했다. 그때까지도 몰랐다. 그냥 아버지 계획대로 했다고 하면 조서가 빨리 끝나고 아버님이 알아서 잘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식구 다섯 명 중에 한 사람이라도 감방을 나가서 식구 한 사람이라도 감방에서 살리라고 하던 아줌마의 말을 듣고 두 달 동안 감방에서 굶었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수용소에 들어갈 때 우리 가족이 제일 늦게 종성 수용소에 들어갔는데 제일 먼저 그곳에서 나왔다.

종성수용소에서 나오면서 온 가족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버지는 많이 수척해지셨고 덥수룩한 수염 때문에 아버지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오죽하면 어머니 뒤에 서서 어머니 옆구리를 꾹 눌러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어머니는 아버지를 못 알아보시고 모르는 사람이 옆구리를 찌른다고 화를 내신다. 어머니가 화가 나서 뭐라고 한마디 하려고 아버지 얼굴을 다시 보는 순간 어머니는 놀라시며 눈물을 흘리신다. 어쩌면 가족들이 수용소에 들어 갈 때하고 나올 때가 이렇게 많이 변할 수가 있을까. 오빠는 영양실조로 왼쪽 이마 위에 내 주먹 크기의 머리카락이 빠져있었다. 우리 가족은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서로 눈빛 교환으로 서로에 대한 안부를 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회령시 안전부에 오면서 다시 여자 세 명과 남자 두 명은 헤어졌다. 그것이 아버지와 오빠의 마지막이 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

창태리에 추방되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살아가던 어느 날 그 농장에 추방돼 온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저씨 말로는 감방에 있을 때 아버지하고 아들이 들어왔는데 그 집 아버지가 감방에 들어와서 일주일 있다가 죽었고 다시 일주일 있다가 그 아들이 죽었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제나 저제나 언제쯤 돌아올까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데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소리 내어 울지도 못했다. 소리 내서 울면 반항한다고 잡아가니 슬퍼도 마음 놓고 울지도 못하는 세상이다.

조서를 받을 때 고생할 가족을 위해 한다고 한 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 아버지하고 오빠가 저 세상으로 간 것만 같아 얼마나 많이 후회하고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아무리 후회하고 눈물을 흘려도 아버지와 오빠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그 죄책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내 생이 끝나는 날까지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이는 법구경에 나오는 말이다.

“지은 죄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금세 짜낸 젖이 상하지 않듯, 재에 덮인 불씨가 꺼지지 않듯, 지은 업이 당장 보이지 않는다 해도 그늘에 숨어서 그를 따라다닌다.”

그렇게 나는 우리 가족의 막내로 태어나 아버지가 안 계시는 집에서 가장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집안에 모든 일은 내가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나와 달리 언니는 겁이 많아서 무슨 일이 생기면 겁부터 내다보니 모든 일은 내 몫으로 돌아갔다.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한 많은 세상 저주 하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창태리에서 늑막염과 복막염을 앓으면서도 산에 가서 땔 나무도 해야 하고 옷을 만들어서 먹을 것도 해결해야 했다.

하루는 전기도 없어서 등잔불을 켜고 손마선(손으로 돌리는 미싱)으로 철수 할머니의 아들 모자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모자를 만들고 있었다. 그날 언니는 퇴근해 오다 의사선생님을 만났다. 언니는 의사선생님께 “우리 동생 병이 어떤 상태입니까?”라고 물었다. 의사선생님은 언니에게 “손맥으로 진단을 해서 결핵이라고 진단이 나올 정도면 심각한 상태다. 그 상태라면 환자는 오래 살기 힘들다.”라고 했다. 언니는 의사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울면서 집에 들어오더니 등잔불 아래서 미싱을 돌리는 나를 보고 일을 하지 말라고 한다. 나는 언니가 울고 있기에 무슨 일인가 하고 물었다. 언니는 “좀 전에 의사선생님이 그러시는데 니가 오래 못산다고 이야기했다”고 말한다. 나는 언니에게 “울지 마라 당장 죽는 것 아니다. 그러고 죽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말해 주었다.

그 후 내 몸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걸을 때마다 양쪽 폐에서는 찰랑찰랑 물소리가 나고 가슴은 심한 통증으로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웠다. 아버지가 살아서 옆에 계셨으면 내 몸이 이 지경으로 될 정도로 놔두지 않으셨을 텐데 아버님이 안 계시니 누구도 내 병에 신경 쓰는 사람이 없다. 오직 모든 건 내가 알아서 해야 했다. 살림살이도 땔나무도 병 고치는 것도 오로지 내가 알아서 해야 한다. 하루는 자다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왔다. 숨이 멎는가 싶더니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하면서 살아났다. 그 후로 나는 누워서 잠을 자지 못하고 앉아서 잠을 자야했다. 앉아서 잠자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누우면 숨을 쉴 수 없는 데다가 가슴통증으로 누울 수 가 없었다. 너무 힘들고 지쳐서 때로는 ‘아버지 저도 아버지 있는 곳으로 갈게요.’하며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아버님은 살아계실 때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몸소 실천하셨다. 복막염도 심해져 보통 임산부 6개월가량 된 배로 나와 있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꼭 살아서 아버지와 오빠를 죽인 사람들에게 복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지 않고 살아서 꼭 남조선을 가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살기 위해 열심히 약초를 캐서 1년을 먹었다. 그러니 내 몸은 조금씩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북한에서는 아무리 살아봐야 잘 먹고 잘살 수가 없었다. 날로 더해가는 식량난에 아무리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해도 입에 풀칠하기조차 힘든 세상이었다. 인간으로서는 모든 자유와 권리가 깡그리 짓밟히고 있는 공산주의 주체사상 체제에서는 나와 가정의 행복도 앞으로의 미래도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북한체제는 우리 가족과 나의 가슴에 슬픔과 설움을 주었다.

나는 지금은 자유의 몸이다. 어쩌면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가 아버지와 오빠의 목숨하고 바꾼 것과 같은 것이다. 아버지와 오빠의 목숨하고 바꾼 자유를 누릴 때마다 나는 너무 사치스럽고 죄스럽기 그지없다. 살아있는 게 정말 죄송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