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살기 좋은 생명 안전의 복지(福地)로 꼽히는 열곳 '십승지(十勝地)'가 있다. 그 중에서 손꼽히는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속칭 금당실(金塘谷). 힐링처이자 땅의 유토피아, 생명지촌(生命之村)으로 와 본 사람들 마다 온화한 기운을 느낀다고 입을 모은다. 십승지는 비기(祕記)적 예언서 <정감록>에서 기근, 역병, 전쟁이 없는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의 땅이다. 위로와 치유를 받아야 하는 에코로지(ecology)시대에 어메니티와 문화자원이 있는 머물고 싶은 동네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백두대간 소백산 줄기 남쪽에 자리한 용문(龍門)은 북쪽에 우뚝 솟은 소백산맥 매봉(문경 동로면, 효자면 경계 865m)을 먼 뒷산(祖山)으로 해 서산으로 국사봉(727m,유천면 문경동로면 경계), 동쪽으로 매봉산(예천읍 용문면 감천면 경계), 남산으로 백마산(白馬山,388m용문면 예천읍 경계)이 닭이 알을 품은 것처럼 아늑하게 둘러싼 곳이다. 황하 지류 위수(渭水)가 흐르는 周, 秦, 漢, 唐의 수도인 관중땅과 지세가 흡사하다. 용문면 정 중앙에 금당실이 있다(上기사).
매봉과 국사봉 사이 용문산은 고려 명종이 정중부난 이후 1170년 태자(강종)의 태실을 찾아 전국명산을 다니다가 찾은 이후 고려 조선조 태실이 부근 곳곳에 있다. 용문면은 제곡(渚谷) 휴구곡 유리 등 북3면(33개동)을 일제의 전국 행정구역 개편 때인 1914년 용문면(18개동)으로 통폐합 된 것.
기라성같은 명사들도 금당실(용문)을 찾아 애정을 표했다. 한성에서 살았던 정윤목(1571~1629)이 학가신월(鶴駕新月), 골암소우(鶻巖疎雨), 선동탐춘(仙洞探春), 용문상추(龍門賞秋), 후서운가(後墅耘歌), 전계어적(前溪漁笛), 송현모연(松峴暮烟), 부용제설(芙蓉霽雪)의 금곡팔영(金谷八詠)을 노래한 이후 오경(雅眉半月, 柳田暮煙, 仙洞歸雲, 龍寺曉鍾, 竹林淸風), 팔경(東峀湧月 南山宿霧 西峰落照 北城飛雨 長林牧笛 등)이 나왔다.
금당실 주변에 선동(선리) 죽림(대수) 구계 성현(솔고개) 용문사 맛질은 명처다.
이곳이 특이한 것은 하나의 집성촌이 아니라 감천문씨 등 다양한 성씨가 용광로처럼 대동(大同)사회를 이뤘다.
안동권씨는 개령(고령) 현감 권지(權輊)가 금당실에 입향 이후 세거했다. 권지의 5세손 권적(權迪1626-1679)은 영암군수 시절 제1의 목민관으로 왕의 상을 받았고, 충주 목사를 지낸 후 선정비가 지금도 충추시에 있다. 충주목사 직후 금당실 북촌에 1677년 작은 집터에 세칸 와가 두칸 초가를 지었다(權忠州家). 청백리 가옥이자 금당실에서 最古 목조 와가(가장 오래된 기와집)인데, 2020년을 전후로 무너졌다. 평양 서윤, 남원 부사를 제수받고도 노모 봉양을 이유로 응하지 않았다. 사간 정언 재직 시 세칭 '영남삼사간(嶺南三司諫)'중에도 으뜸이었다. 사헌부 집의(종3품)시절 한성에서 별세하자 왕명으로 귀향, 장사를 치루게 하고 호상(護喪)토록했다. 권적이 남긴 '구곡문집'은 목민심서의 원형으로 볼수도 있을 만큼 목민관에 대해 외치고 있다. 야옹 권의 후손인 맛질 권씨는 문과급제자가 5명이다.
이후 용문의 안동권씨들은 국제기업인 스텐포드호텔 H마트 권중갑 회장, 권재진 장관 등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1010년 개심사 5층석탑(보물)에 새겨진 임장부 세습 호장, 무신정권 때 아버지가 처형되고 피난한 국순전 저자 임춘 등(고려사열전) 예천임씨(용문면 직리 등)는 무신정권 이전에는 예천의 지배자였다. 이와 함께 예천에 세거한 예천권씨는 명봉사비에 기록돼 있을만큼 유구한 역사를 지니는데, 서예가 초정 권창륜, 권중호 경북대 농대학장 등이 후손이다. 충목왕 이름이 흔(昕)씨였는데 외가 성씨인 권씨로 바꿨다. 도시(都試)에 장원 급제, 세종 문종조에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낸 권맹손(1390~1456)의 딸이 소산 안동김씨 김계권과 혼인해 낳은 아들이 대문호이자 세조의 왕사(王師) 학조대사, 김영전감찰, 김영균진사,김영추부사, 김영수장령(현손이 김상헌 김상용)이다.
한성 판관을 지낸 김계권의 딸(김간아)이 다시 금당실 서측 구계리 전주유씨 유유(성종실록柳牖)과 혼인했으니 소산과 금당실의 인연이 깊다. 두문동 72현 유휘종의 후손인 유유는 연산군조에 실각 구계에서 손자 대까지 살았는데, 후손이 대죽리가 잉태고향인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柳一韓, 1895 ~ 1971) 박사다.
십승지로 지목되는 선리(仙洞) 흐리(허리 원류리)골
십승지를 최초로 밝힌 16세기 문헌 <남사고비결>은 금당실 북쪽을 십승지로 지목, 선동(仙洞,선리)이나 흐리(허리)골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설득력을 지닌다. 선동은 성골(큰마) 두들마 한밭 성안 샛마 절골 갓바위 등 7개 마을이다.
신라 북진의 전진 기지였던 어름성은 한국판 'virgin land'
용문 선리에 있는 옛 산성(山城)은 속칭 '예천성'으로 불리는데, 현 지도에 어림성터로 표시돼 있다. 외성(예천성안) 옆 내성(속칭 풍기성)이 있는 쌍성이었다. 고구려성 석축 방식으로 5C. 광개토대왕의 남진 때 쌓은 것으로 추측되며 신라의 북방 산성(조선시대엔 '상을곡성' 이라고 세종실록지리지에 한자로 기록)이 됐다. 진흥왕의 삼한일통 중원(충북) 정벌의 주력군이 주둔한 성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진흥왕이 550년에 단양 적성비를 세우는 등 정복 한 영토를 순행했으니 그 앞서 먼저 이곳이 북방 개척에 전진 기지로 활용했을 것이다. 이 산성은 본성을 에워싸고 은풍면 부노성, 동로면 할미성(古母성)과 문경과 단양 경계의 생달리 작성(鵲城)이라는 3개의 자성(子城, 외성)이 있는 요충성으로 국가 사적지로서 가치가 충분하다. 이 산성의 주산(主山)인 장군봉(820m) 아래 서낭당인 갓바위와 진중 사찰(구 示完寺, 1927년 청룡암)이 있다(김봉균 역사학자 연구). 백두대간을 넘어 보은 삼년산성이 470년에 축조됐으니 그 즈음 축성했을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까지 군량미 창고로 사용됐다.
이 산성 명칭과 관련, 원래 변방을 지키는 뜻의 어름성을 훈차해 빙성(氷城), 소리나는대로 음사해 어름성(御廩城)이라 했다는 것이 강원대 강단에 섰던 역사학자 김봉균 박사의 연구결과다. 또는 울골성(변방 경계란 뜻의 울)을 한자로 상을곡성. 어림성(御臨城)은 1918년 일제 총독부가 만든 「조선 5만분의 1지형도」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오기(誤記)다. 석기 시대 유물이 나온 곳.
용문의 정수리같은 이 성터에 현재 양수발전 댐을 세웠으니 안타깝다. 앞으로 흐르는 성안(城內) 못에서 나오는 아기자기한 작은 폭포를 이룬 뒷내(금곡천) 발원지다. 선리(仙里)라는 이름대로 신선이 살법한 한국판 'virgin land'다. 갑오동학 실패후 전도야지선생이 은거했다. 최덕수 전 대구고법원장, 강성조 경북도 부지사의 고향. 기이하게도 성안에서 10개의 샘에서 용출수가 솟고 겨울에도 따듯한 천혜의 마을이다. 산성 정문을 수리하고 고유제를 지낸 기록이 구한국시대 권경하의 '정암문집'에 있다.
왕건이 두운 선사를 만나러 온 '용출영문(龍出迎門)’ 스토리
예천에는 "금당실가서 옷(의관)자랑하지말고, 구럴(구계)가서 집 자랑하지 말고, 대수(죽림)가서 말 자랑하지 말고, 맛질(대제)가서 글 자랑하지 말라"는 얘기가 있다. 병암정자와 함께 <죽기 전에 꼭가봐야 할 국내여행> 책에 실린 국가명승지 초간정이 있고, 그 위에 (통일)신라 고찰 용문사가 숨어 있다. 15세기 훈구파 문신 서거정은 용문사에 와보고 "여기 내가 있음(吾存)도 잊는다"고 했다.
용문사는 고려 조선의 국찰이다. 831~847년 범일 국사와 함께 도당 유학했던 두운선사(杜雲禪師)가 초암(草庵)으로 개창한 용문사는 후삼국 통일 방략의 지혜를 구하고자 태조 왕건이 두운을 예방하러 오자(927년초?) 입구에서 용이 나와 맞이한 ‘용출영문(龍出迎門)’고사(의종이 1165년 중수를 명한뒤 세운 重修龍門寺記) 를 간직하고 있다. 이후 왕건은 후삼국 통일 이후 용문사를 30칸으로 중창했다. 고려 명종이 정중부난 이후 전국의 명당을 찾아 세자(강종)의 태실을 조성한 용문사에서는 1187,1173년 의종 복위를 내건 김보당병마사의난 때 3만승려가 모여 '국난극복법회'를 열었다. 조선 세조도 경상도 감사에게 용문사를 보호하라는 친필서명 교지(보물)를 내렸고 임진왜란때 승병지휘소였던 호국사찰이고 손병희선생이 21일 간 기도를 드렸던 곳이다.
윤장대와 함께 국보인 대장전은 국내 최고(最古)목조 건물로 알려진 봉정사 극락전과 비슷한 오래된 건축이라고 한다. 국사(國師)봉 동북쪽 마을은 70,80년대 신민당 거목 신도환(뒤낟 마을), 대창고등학교를 나와 서울대 정치학과 입학시험과 80년 민정당 창당 전문위원 공채에 연달아 수석합격한 윤 육의 뿌리다.
국보 가치 <대동운부군옥>은 서정주 '석남꽃' 시와 노회찬 '소연가'의 배경
금당실 서쪽으로 약 800여m 가면 전망이 일품인 죽림(竹林,대숲 대수)리는 존화 사대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식 사서(史書) '대동운부군옥'을 편찬한 초간(草澗) 권문해의 고향이다. 프랑스의 달랑베르(D’Alembert)와 디드로(Diderot) 출간보다 170년 앞 선 16세기 작(作)으로 국보의 가치를 지닌다. 국불천위(國不遷位) 사당과 종택, 별당(보물) 이 있다. 성균관에서 이율곡을 포용한 초간 권문해다. 죽림에서 해뜰 무렵 솔둥지 넘어 아미산도 장관이다.
서정주는 <대동운부군옥> 설화를 1969년 '석남꽃'이라는 시로 지었다. 신분을 뛰어넘고 이승 저승을 넘나들며 비극에서 희극으로 해피엔딩한 석남 최항의 러브스토리는 로미오와 줄리엣 보다 격이 높다. 이부영을 이어서 진보정치인의 상징이 된 노회찬이 이 시에 작곡을 한 것이 '소연가'다.
초간의 조부들 5형제 중 3형제가 대과, 2형제는 약관에 진사시에 급제한 조선 명문 대가다. 무오사화 때 홍문관 교리 권오복은 처형 당하고, 두 형제(권오행 공조 좌랑, 권오기 예문관검열 사헌부집의)도 유배를 갔다. 아랫 금당실이 쑥대밭이 됐다.
독립운동가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의 15대조 입향 구계리
죽림 서쪽 구럴(구계리) 마을엔 의성김씨 남악 김복일의 후손이 거주하는 고택(국가지정문화재, 1634년 용문사 승려 건축, 현 남악종택)이 있다. 이 곳은 원래 유일한의 15대 조부 유유(柳牖)가 연산군의 폭정과 결별하고 은거지로 처음 터 잡았다(류유는 홍건적난을 평정한 김득배의 사위 류휘종의 직계후손). 유일한의 부친으로 독립운동가 유기연은 대죽리에 살다가 보부상으로 평양 등에 가서 사업을 했다고 건국대 사학과 김시우 교수는 저서에서 밝혔다. 유유가 이 종택을 초창해 손자까지 살다가 유유의 사위 변희리 이후 6대가 살았다. 이후 의성김씨(척화신 불구당 김주)가 살았으나 태종 아들 후손들(이참봉)의 소유였다가 1960년경 의성김씨 문중이 재매입했다. 김윤주 전 군포시장이 남악과 일가다.
구계리 전주이씨 집안에는 거문고 중 가장 오래된 태종(이방원)의 어사금(御賜琴,문화재)과 1792년 정조의 교지로 지은 이정사와 사당이 있는데 종손이 병자호란때 후사없이 사망했다. 150여년 종손이 부재하다가 정조 명으로 이병성을 봉사손(祀孫)을 정했는데 부장판사 출신인 이승택 변호사가 그 주손이다.
을미 의병전쟁 의병장의 맛질마을
경상도에는 옛부터 '금당 맛질 반서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금당실의 지형이 한양과 유사하고 두 마을의 번화함이 서울의 반(半)쯤 된다는 얘기다. 맛질(용문면 대제리)은 내성천에 합류하는 한천을 사이에 둔 마을로 옥산 황새산 작약산 삼봉(三峰)이 정겹게 서 있다. 안동에서 이주한 복야공 후손 야옹 권의(충재 권벌의 형)가 맛질 마을에 입향한 이래 후손들이 대과에 다섯이 급제하는 등 대성을 이뤘다. 궁중음식을 관장한 사옹원 주부 권심언의 집안이 <음식디미방>을 저술한 장계향의 어머니 친정이다. 음식디미방엔 맛질요리 14가지가 수록돼 있다. 권심언의 4남이 춘우재 권진.
팔만대장경을 번역하고 '한국지명연혁고'라는 대작을 남긴 권상로 전 동국대총장, 권교택 한솔그룹 CEO, 권재진 전 법무장관, 권영수 제주도부지사 시도지사협의회총장(도지사급), 야옹의 주손 권기선 부산경찰청장, 권세준 덕성여대 교수, 권형택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사장 등이 후손.
맛질은 을미사변 이후 위정척사를 뿌리로 동학농민혁명군이 가담한 을미 의병투쟁에 나선 나암 박주대(예천의진 의병장 박주상 등 집안 '주'자 항렬 셋이 모두 독립유공자로 서훈)가 지은 '수록'의 탄생지다. 19세기 한문일기로 함양박씨 6대(代)가 써 보물로 지정된 '저상일월(渚上日月)'을 토대로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가 펴낸 '맛질의 농민들'의 무대다. 맛질 선인들이 물가 저(渚)를 애용하는 것은 맛질에 양쯔강(長江) 적벽(赤壁)같은 곳이 있어서가 아닐까.
한국 임학의 태두 임경빈 박사, 박영각 중소기업중앙회 전무, 노무현 대통령이 아낀 박재묵 충남대 교수 등을 배출.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처럼 상주의 조 대감 딸과 종놈의 금지된 러브스토리 '맛질굿'이 전해오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맛질이라는 지명은 은풍현 12골짜기(현 상리면 하리면)로 들어가는 처음 길이라는 맏질, 미산제에도 쓰인 성현의 말씀을 맛본다는 맛길(味道, 송나라 주자의 미도당기), 임금 진상품인 마가 난다는 마길 등 여러 설이 있다.
금당 맛질 사이 밤실(하리면 율곡리)과 용문 능천리 마을은 고려말 우왕 복위 주모자인 율은 김저와 후손들이 은거한 곳. 최영 장군의 나이 많은 생질로 공민왕을 보필했던 김저는 우왕을 폐위한 이성계를 살해하려다 순절했다('고려사'와 광주대 교수의 논문).
경북대학교 계약교수인 김정모 법학 박사는"유럽의 종교개혁과 과학・시민・산업혁명은 십자군전쟁 이후 아랍에 남아 있던 그리스 로마 역사를 찾아내 복원한 르네상스에서 시작했다"며 "용문에 남아있는 유불선과 프로테스탄티즘 윤리 등 산업화 이전 문화 속에 시대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가 있다"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