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에 와서 결혼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 했다. 정신없이 통일교육 강사로 활동하며 지내는데, 이제 남한에 정착도 했으니 결혼을 하는게 어떻겠느냐는 지인의 권유를 받았다. 처음에는 이제 혼자 살아가는 게 서서히 익숙해져 가는 터라 대수럽지 않게 여기고 있는데, 몇 차례 권유에 그래도 한번 만나는 보자 싶어 소위 말하는 소개팅을 했다.

 그래서 시작한 만남이 1년 가까이 이어졌다. 그러다보니 남편될 사람의 믿음직스러움과 사람 됨됨이에 빠져들어 결혼을 결심했다. 결혼을 마음먹으니 결혼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지가 막막했다. 곁에 부모형제가 있으면 함께 예단도 보러 다니고 할텐데... 어디 가서 드레스와 한복을 고르고 예단을 맞추어야 할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 이제 모든 걸 예비남편한테 맡기자면서 남편을 따라 다녔다. 함께 예식장을 예약해 놓고 결혼반지를 맞추러 갔다. 평생에 처음으로 금반지를 껴본다고 하니 예비남편이 목걸이와 팔찌까지 선물해 주었다. 그냥 눈물만 나왔다. 나중에는 그냥 펑펑 울었다.

 북한에서는 결혼 금반지를 예물받는 경우는 소문으로만 들을 정도로 드물었다. 또 예단과 혼수도 준비해야 했다. 주변에 알아보니 시부모님이 혼수목록을 얘기해 주시면 신부 측에서 그에 맞게 해간다고 했다. 시부모가 안계시지만 그래도 기본은 해가야겠다 싶어 tv, 양문형냉장고, 세탁기. 밥솥 등을 준비했다. 그야말로 최소한의 준비였다.

 준비과정에 도와주신 분들이 아직 눈에 선하다. 감사하기 그지없다. 혼수를 고를 때 전자매장에 같이 가서 골라주신 분, 필자가 십 년 넘게 봉사활동을 해왔다고 결혼식 날 혼주석에 앉아주신 경산시의 어느 동장님 등등 많은 분들의 사랑과 배려, 응원을 받으며 결혼식 준비를 했다.

 이렇게 해서 결혼식 날이 되었다. 북한에서는 대부분 집에서 일가친척들과 이웃들이 모여 음식을 장만하여 결혼식 상을 차려서 식을 올린다. 필자는 대구 엑스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대구시장님이 축사를, 통일부 차관님을 비롯해 주요 기관의 대표님들도 축하를 해주었다. 부모님과 형제들이 없는 자리였지만 그래도 많이 외롭지는 않았다.

 결혼식 후에는 신혼여행이 준비되어 있었다. 사실, 북한에서 살 때는 신혼여행이라는 말조차 모르고 살았다. 당연히 북한에서는 신혼여행을 가지 못했다. 결혼식을 집에서 하다 보니 집안의 큰 어르신들께서 덕담을 해주시고 피로연이라 할 수 있는 저녁 시간엔 신랑신부가 친구들과 저녁식사도 하고 오락도 곁들이면서 빨래 방망이로 신랑 발바닥을 두드리는 장난도 치고 했다.

 대체로 탈북민들은 남한에서 결혼하면 신혼여행지로 제주도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필자는 전주 한옥마을과 순천만, 순천만 국가정원, 보성녹차밭 등을 다녔다. 남편이 번잡스러운 곳보다 조용하고 정감있는 곳을 선택해 편안하게 해주려고 한 배려 덕분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신혼여행 온 날 알고 지내는 지인부부 두 쌍이 신혼 여행지에 깜작 등장한 것이다. 결혼식 날 북녘에 두고 온 친척들이 생각날까 봐 즐겁게 놀아주려고 왔다는 것이다. 당황스럽고 이 사람들 왜이래?하는 생각도 잠시뿐 우리 함께 어울려 전주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정신없이 놀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두 쌍의 부부들 때문에 정말 즐거웠다. 지금도 그분들에 대한 우정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남한에 정착 이후 개인적으로 가장 잘한 결정은 결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생을 함께할 반려자를 만나 행복이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어 이보다 더 큰 행운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우주(통일교육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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