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 년 전, 경북 예천이 백제와 마한의 최후 격전지였다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됐다. 최근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백제의 마한(馬韓)정복은 예천 문경 일대 마지막 마한연맹의 약 8년간 이어진 항전끝에서야 이뤄졌다. 이는 당시 예천이 삼한의 요충지역이었음을 보여준다.

중등학교 교사 출신인 김두년(77세. 예천읍 노상리)향토사 연구자는『삼국사기』기록과 지명, 그리고 민간 전승을 종합해 마한의 최후 항전지를 추적했다. 그 결과, 용비성이 예천 용궁면의 원산성, 우곡성이 용문면, 은풍면 경계의 현 어림성(신라시대엔 어름성 울골성으로 불렸고 조선시대 상을곡성으로 공식 기록)으로 비정했다. 또한 인근 문경의 현 고모산성이 금현성으로 확인되면서, 이 일대가 백제 온조왕의 침략에 맞선 마한연맹의 마지막 보루였다는 것이다. 연구자는 “마한의 목지국 함락 이후에도 마한의 잔존 세력은 끈질기게 버티다가 백제에 흡수됐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예천은 옛 역사서에 나오는 ‘주근 장군’과 깊은 인연이 있다. 주근은 마한의 장수로서 온조왕 34년(서기 16년)까지 우곡성에서 끝내 저항하다 최후를 맞이했다(삼국사기). 예천읍 뒷산 흑응산성터에 예천군수가 하늘에 제사 지낸 사당을 세웠는데, 언제부터인가 거기서 매년 음력 4월 15일, 주근 장군을 기리는 ‘주근장군제’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안동·의성까지 함께 참여할 정도로 성대하게 치러졌다고 전해진다. 백제 마지막 장군이 계백이듯이 마한의 마지막 정군은 주근이다.

지역민들에게 익숙한 ‘옥주낭자 전설’도 연구에서 주목받았다. 전라도 출신의 옥주낭자가 주근 장군의 군자금을 지원했다는 이야기는 낙동강 수로를 통한 활발한 교역과 예천의 전략적 가치를 보여준다. 이는 예천이 단지 전쟁의 무대였을 뿐만 아니라, 낙동강, 내성천을 통해 물자와 문화가 흐르던 중요한 통로였음을 시사한다.

김두년 연구자는 “예천은 백제 침략에 마한의 최후 항전이 전개된 곳이자, 그 기억이 오늘날까지 민간 전승으로 이어진 드문 사례”라며, “지역의 역사적 자부심을 높이고 교육·문화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 소중한 유산”이라고 강조했다. 

이 연구에 대해 "예천이 지닌 역사도시 위상을 다시금 확인시키며, 지역민들에게 은근과 끈기의 고을인 예천 정체성의 뿌리를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향토연구가인 권상헌씨는 평가했다.

 김정모 법학 박사는 부족국가인 소국의 연맹체 마한연맹에 대해 "기원전 3세기초 중국 연나라 유민 위만이 군사반정으로 대동강 평양에 있던 (고)조선 준왕이 축출되자 남하 하여 세운 나라이지만, 경북 예천 일대가 마한에 복속됐다는 것은 정설이 아니라"고 말했다. 다만 "어름성은 신라 삼국통일의 전진 군사기지였다는 점에서 예천이 국궁과 양궁 도시가 된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말했다. 

한편 예천군은 8세기 수주(水州)군이 개칭한 것이고, 앞서 삼한시대에는 물사벌성의 소국이었다가 신라에 병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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